[밑줄독서] 한병철 - 시간의 향기

1. 잃어버린 시간의 향기를 찾아서

by AND ONE
항상 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다. 밑줄은 세상과의 만남이다. 밑줄을 긋는 행위는 본인이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에 대한 '인식'의 영역에 속한다.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한번 밑줄을 보며, 그때의 생각과 느낌을 반추하는 행위의 반복은 곧 자신만의 '의식'이 된다. 이러한 연유로 밑줄 긋기는 나만의 독서 의식이 되었고, 밑줄은 세상과 나를 잇는 선으로써 'MEETJUL'이 되었다.

오랜 시간 지하철을 타야 했던 환경 덕분에 독서할 시간이 많았다. 다먄 양질의 시간은 아니었다. 자꾸만 부딪히는 어깨들과 고막을 타고 들어오는 타인의 목소리. 잡음들에도 그 나름의 향기가 있었다. 노동자들의 땀에 젖은 옷과 젊은이들의 꾸밈 가득한 향수 냄새는 각자의 이유로 알코올 향과 섞여 지하철 공간을 가득 채웠다.


대학생에서 졸업생, 졸업생이자 취준생으로 신분이 바뀌자 시간의 향기도 달라다. 카페는 커피향으로 가득했다. 각자의 이유에 따라 커피는 여유 또는 각성의 향기가 되기도 했지만, 나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습관적으로 시킨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카페의 공간을 대여하는 시간의 가격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공간이 되었다.


그 순간 내 삶의 향기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마침 한병철 작가의 <시간의 향기>가 눈에 들어왔다. <피로사회>, <투명사회>, <아름다움의 구원>에 이어 오랜만에 읽게 된 그의 책이었다. 책의 주제는 곧 부제와도 같다. "머무름의 기술". 철학 교수답게 '사색적 삶'의 다양한 모습을 특유의 건조한 문체로 현대 사회의 폐부를 찌른다.


굳이 아쉬운 점이라고 한다면, 하이데거와 보드리야르, 칸트 등을 레퍼런스로 삼으며 본인의 주장을 펼치게 되는 순간, 책 내용이 어려워 질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식견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탓이겠지만, 시간의 향기를 찾다가 수면의 향기를 맡아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옥 같은 문장들을 만난 건 큰 행운이다. 번역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재차 읽으면서 '머무름의 기술'을 스스로 깨우치라는 역자의 의도였으리라 합리화 해본다. 아래는 책을 읽으며, 밑줄 그었던 문장들 중 일부를 발췌했다. 이 문장들이 여러분에게도 울림을 줬다면, 그 순간 만큼은 향기로운 시간이었으리라 감히 확신해본다.



"삶이 가속화된다는 느낌은 실제로는 방향 없이 날아가 버리는 시간에서 오는 감정이다. (중략) 방향이 없는 시간의 흐름은 가속화라고 할 수 없다. 본래 가속화란 방향성 있는 궤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이 점점 더 다양화되는 경향이 개개인을 과도한 부담으로 짓누르고 과민 상태로 몰아간다. 따라야 할 시간 규정이 사라진 결과, 자유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 상실 상태가 초래된다."
"결국, 시간이 없다는 이러한 의식은 예전처럼 시간을 미루며 낭비하는 것보다 더 큰 자아의 상실을 가져온다."
"진리와 인식은 지속을 바탕으로 한다. (중략) 인식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 속으로 데려와 묶어두는 시간적 집중에 의지한다. 시간적 연장성은 진리와 인식 모두의 특징인 것이다."
"모든 사색적 계기가 소실된다면, 삶은 일로,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행위로 퇴락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