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임의 시간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오늘은 어머니를 모시고 국립암센터에 다녀왔다.
5년 동안 4번의 수술을 하고, 30번의 방사선치료를 받고 우리는 미각을 잃었고,
1차 항암치료는 후유증으로 멈춘바가 있다
마지막 네번째 수술에서 의사는,
이후에 재발을 하면 수술은 어렵다고 미리 고지를 하였다. 그게 지난 해 10월이다.
그리고 3개월이 다 채워지기 전에 우리는,
재발암 판정을 받고 다시 PET CT 촬영을 하였다.
그리고 오늘은 방사선과 의사를 만났고
4군데 암의 모습과 임파선에 전이된 상태를 고지 받았다.
암이 더 커지면 힘들어지니 방사선치료를 권하였고
어머니는 방사선 치료를 받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꼭 받아야하는지 내게 물으셨다.
어제 나는 짧은쇼츠를 보았다.
아직 젊은 어머니가 가발을 쓴 모습으로 김창옥 쇼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항암을 35회 진행했어요. 너무 하기 싫었는데 딸이 원했어요.
딸이 나에게 아직 나는 엄마가 필요해, 이 말에 제가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 말이 내게 비수같이 꽂혔다.
나도 종종 엄마에게 똑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엄마, 나는 아직 엄마가 필요해
그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사랑하는 엄마는 나때문에 버틴건지도 모르겠다.
힘든 고통과 치료의 과정들, 수술대에 오르고 중환자실을 거치고
마취도 없이 실밥을 풀던 그 많은 시간들
미각을 잃고, 치아를 잃고, 턱을 잃고 힘겹게
매일 매시간 똑같은 야채죽과 감자샐러드, 아보카도, 연두부를 삼키던 순간들
그걸 5년동안 한번도 지루해하지 않고 삼시세끼를
엄마는 웃으며 때론 맛있다며 열심히 나 잘먹지 이러면서 드셨다.
아마 그 고통은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상을 차려드리고
반은 흘리고, 반은 입으로 드시는 모습을 응원하며 지켜봐주는 것이였다.
하루 2-3시간의 힘든 식사를 옆에 있어주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때로는 엄마와 양손을 맞잡고 춤을 추기도 하고
매일 목욕을 시켜드리고 개운한 상태를 유지하실 수 있도록 도왔다
계절이 바뀌는 산을 함께 보며 우리의 하루의 삶을 감사했다.
아침이 되면 새벽미명부터 식탁에 앉아서
말씀을 묵상하고 녹취하고 기도문을 읽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은
내가 평생에 바라 본
가장 익숙하고
가장 안정감있고
가장 엄마다운 모습이였다.
어머니가 써준 수많은 편지들과
나의 고비때마다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준 그 수많은 순간들을
나는 한순간도 잊을수가 없다.
한달전 즈음에 엄마와 신기한 대화를 나누었다.
엄마는 이제 하늘나라 가고 싶단다.
그래서 물었다, 어떻게 가려고?
할렐루야 부르며 가지 -
(근데 왜 그 말이 싫지 않았는지, 엄마가 정말 행복해보였다)
그럼, 나는 어떻게하고?
너는 하나님께 맡기고 가지 -
(이상하리라 만큼 안정감이 찾아왔다. 어쩜 엄마를 나도... 기쁘게 보낼 수 있을까 싶을만큼)
그래서 비로소,
이 모든 대화를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우리 가운데 평안을 주셨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조금 더 담대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지금 주체없이 흐르는 눈물을 나는 어쩔 수가 없다.
보고있어도 보고싶은 엄마를
나는 잘 보내줄 수 있을까
아무것도 익숙하지가 않아.
그저 덜 고통이 있기를
더 많은 평안과 감사가 있기를
임마누엘이 놀라운 능력으로 임하기를
전심으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