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무엇인가
특별히 힘든 삶이 아니다. 돈은 없지만 먹고사는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고, 신체도 건강하다. 젊고, 아름답다. 심각한 갈등에 휘말려 있지도 않다. 그저 평탄하게 흘러가는 삶이다. 이대로 쭉 간다면. 그러나 이대로 쭉 갈 수 없을 거라는 걸 모르지만 알고 있다. 쇠약해지고 늙을 것이며 더 많은 사회적 지원을 필요로 하게 되겠지. 점점 더 외로워지고 스스로에게 한계를 부여하는 일이 많아지겠지.
어제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지나 집으로 오면서 가슴이 답답했다. 왜 살고 있는 거지? 당장에 죽어도 상관이 없구나. 육체의 고통만 없다면. 나의 고양이는 다른 사람이 데려가면 더 윤택하게 살 수 있을 테고, 내가 없어도 주변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 같다. 가까운 사람의 슬픔? 그들은 또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고 나아가겠지. 너무 비관적인가? 하지만 사실이 그렇잖아.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 주어진 운명이 있을까 정말. 내 몸에 정해진 수명이 있는 걸까. 아니다. 나는 지금이라도 스스로 죽어버릴 수 있다. 혹은 죽음을 당기거나 미룰 수 있도록 몸을 다룰 수 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내 수명이 달라지는 거잖아. 그렇다면 운명은 없는 건데.
죽는다. 어김없이 죽는다. 어차피 죽는데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을 할까. 어떤 삶이 좋고, 나쁜지가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곧 죽는데. 그리고 그 죽음이 특별하지도 않으며 금방 잊혀져버릴 텐데. 더 나은 삶이란 무엇이며 왜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지. 나는 사는 의미를 전혀 모르겠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조금 더 돈을 벌고, 윤택한 환경을 구축하고,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보살펴주는 그런 일들이, 누구나 모두가 수행하는 그런 일들을 굳이 나까지. 얼마 뒤에 죽는데 사는 게 무슨 의미냐는 생각은 죽음과 죽음 이후(그 이후에 시간이 있을까) 에만 초점을 둔 결과론적인 생각이긴 하다. 그리고 나는 죽음 이후에 내가 무엇을 겪을지 전혀 모른다. 정말 죽어보고 싶기도. 죽었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으면 죽어볼 것 같다. 다들 그렇겠지? 죽음 여행 같은 게 만들어질 수도 있겠지 언젠가? 지금까지 알았던 상식이 뒤집혔을 때. 한낱 시시한 삶을 사는 내가 그런 여행을 갈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지만.
어차피 죽는데 밥은 왜 먹어? 맞는 말이다. 왜 밥을 먹니. 안 먹으면 괴로우니까. 삶을 끝내버리지 않을 바에야 살면서 괴롭고 싶진 않으니까. 그렇게 근근이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의미 없이.
와중에 더 나를 만족하게 할 음식을 찾고, 머물고 싶은 식당을 탐색한다. 그렇게 취향이 생겨난다. 그 취향이란 것은 내 주머니 사정으로부터 태동하는 것이지만.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러니까. 그 위엔 자본가가 있겠지. 우리가 웰니스라고 부르는 것 위에도 자본가가 있겠지. 자본가란? 대기업 총수가 자본가인가. 일론머스크인가. 빌게이츠인가. 아니 그 자본가 밑에 밑에 밑에 밑에…. 아주 밑에서 피라미드 기단을 형성하는 일개 노동자들까지 결국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자본가들이다. 나도 그 틈에 멍한 표정으로 끼어있고.
그래서 어제 자전거를 타고 오는 길에 눈물이 조금 났다. 삶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정말 당장 죽어도 문제 될 게 없다는 생각이 우울증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것임을 알면서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남을 돕는 사람은 좀 더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어차피 그 사람이 아니어도 남을 돕는 사람들은 늘 있다. 그리고 그 사람 또한 살아있음으로 말미암아 누군가의 도움을 받겠지. 돈 많이 버는 것은 더더욱 의미가 없고(돈을 많이 가져본 적은 없지만), 아름다운 외모로 사람들에게 인기와 동경을 얻는 것도 한낱 얕은 것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한 시절 아닌가. 영원한 사랑도 끝은 있다. 누군가를 죽음 이후에 계속 사랑하며 그리워한다고 해도 그건 남은 사람의 감상일 뿐인걸.
지나가다 늙고 힘없는 노인을 보면 그 사람의 젊은 날을 떠올려본다. 영화를 되감기 하듯 주름이 펴지고 굽은 등이 바로 선다. 입가에도 조금씩 미소가 번진다. 백발이 점점 거뭇해지고 머리숱이 풍성해진다. 눈에 총기가 생기기 시작한다. 중년을 지나 청년의 모습, 설렘을 담은 눈동자. 들뜬 몸가짐. 청소년. 어린이가 된다. 부모의 눈앞에서 존재만으로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된다(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리고 웅크리고 눈 감은 태아의 모습.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무방비로 세상에 던져진 직후의 모습. 노인에게는 이 모든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누구나 그 태초의 모습을 자기 안에 간직하고 있다. 나도 그렇게 세상에 생겨났다. 웅크리고 눈 감은 채, 울면서, 여기는 어디냐며. 그리고 존재만으로 기쁨을 주는 시기를 지나 이제는 청년기에 머물러 있으며 왜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것이지. 이 문제가 나에게만 천착된 것은 아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마주하고 있을까? 결국 뭐든 붙잡고 의미를 만들려고 하는지, 혹은 허무주의로 죽음만을 기다리며 살고 있을지. 그때 쉽게 떠올렸던 생각은 글을 남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죽어도 글은 남는다. 그래봤자 그 글도 언젠가는 죽는다. 조금 늦을 뿐이다. 어쩌면 내가 죽기 전에 글이 먼저 죽어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글과 그림 그런 것들을 남기는 게 그나마 살면서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닐까. 역사가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만(의미는 부여하는 것이지 시간은 그냥 물리법칙에 따라 계속 갈 뿐이다.) 그 시대를 지났던 사람이 시대가 어땠으며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기록하는 일. 결론이 허무라고 할지라도. 그래서, 결국 죽잖아?
이 모든 게 나 자신만 생각하는 관점인 것 같아 그럼 인류에 대한 관점으로 보자면 인류의 지속과 번영(?)은 무슨 의미가 있지. 그것도 모르겠다.
수천 년 전부터 이런 문제로 골몰했던, 나보다 지적 수준이 높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들이 같은 고민을 치열하게 해서 정리한 이론들을 차근히 공부하면 의미를 조금 알 수 있으려나. 혹은 위로라도 받을까. 날 때부터 현자의 이론을 알고 태어난다면 좋을 텐데. 왜 그런 건 다시 학습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애초에 의미에 자꾸 집착하는 이유가 뭔데. 그럼 아무렇게나 살지 왜 계속 주변을 정돈하는 건데. 안전하고 싶어서. 어차피 죽을 텐데 생존 욕구는 왜 있는 걸까. 정말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