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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밤. 언젠가부터 일찍 잘 수가 없다. 고양이를 껴안고 드러누워 있던 중에 눈에 들어온 책을 펼쳤다. 야생 고라니의 초상들이 담긴 사진집. 책의 앞부분에는 이런 구절이 쓰여 있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신비를 하나의 단어로 덮어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마침 오늘 이름에 대해 생각했었는데. 나는 김춘수의 시 '꽃'처럼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나와 대상과의 관계를 특별하게 만든다는 말에 동의했었다. 그러나 오늘 낮에 문득 반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은 무엇이 되든 중요하지 않아.
사실 아직 나는 내 화단에 심겨진 식물들이 어떤 학명을 가졌는지 모른다. 알려면 너무 쉽게 알 수 있지만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두세 개 빼고는 모른다. 그냥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씩 알아두는 것이 불필요한 매뉴얼을 습득하는 기분이 들어서 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여러해살이풀들이 한데 섞여 있는 작은 정원. 나의 정원. 그걸로 충분하니까. 그래서 모르지만, 모르면서 물을 주고, 모르면서 인사하고, 살핀다.
어떤 것을 합의된 단어로 지명하고 나의 사전에 기록하는 일은 관계 맺는 일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자주 오가며 눈에 익숙해지는 일이, 곁눈질로 휙 보고 지나더라도 여러 번 마주하는 일이, 그러다 가까이에 존재함을 인지하게 되고, 뜻밖의 변화를 눈치채고 놀라기도 하고, 비바람이 불고 눈발이 휘날리면 별일 없길 바라며 졸아든 마음으로 동동거리기도 하다가,
어느 날. 내 삶의 풍경 한 부분에 자리 잡고 나의 '무엇'이 되어 있는 그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무엇으로 불리던 풍경 속에서 자유롭게 뿌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