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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언자 Nov 25. 2016

찾아라! '남의 자리'가 아닌 '나의 자리'를.

영화 [마이 플레이스] 리뷰

인생은 ‘나의 자리’를 찾는 여정이다. 아니,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인생이다. 이것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모험이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모험을 수반한다. 때론 모범 답안 같은 안전한 경로의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을 뿌리쳐야한다. ‘나의 자리’는 내가 찾아 나서고, 만들어가는 것이지, 누군가 미리 정해놓은 ‘남의 자리’에 나란 존재를 억지로 구겨 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저 : 한글 ing

   [마이 플레이스]는 우리의 자리를 고민 하게하는 영화다. 인생의 시작점, 출발선이라 할 수 있는 ‘가족’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한다. ‘과연, 지금 당신이 서있는 자리는 당신의 자리라 할 수 있나요?’ 감독 박문칠(이하 문칠)은 아기가 갖고 싶어 임신한 미혼모 여동생, 그런 딸을 알리길 꺼려하고, 부끄러워하는 아빠 그리고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역이민을 선택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는 엄마의 모습을 기록한다. 그리고 ‘정상성’에 대한 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정상’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비정상’이라 여기는 태도에 있다. 문칠의 여동생은 역이민 후 한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다. 그녀에게 학창시절은 ‘정상’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소위 ‘튀는 학생’이었다. 그녀의 세계관에서 이해가 안되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녀는 저항했다. “내가 왜?”라고 캐물었다. 당연히 한국에서 그녀는 ‘비정상’으로 분류되었고, 힘들었다. 일명 ‘부적응 자’가 된 것.

문칠의 여동생은 익숙한 것에 늘 도전하였다.

   가족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말 잘 듣는 고분고분한 그녀의 오빠 문칠도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는 더 심했다. 당연히 그녀와 아빠 사이에 갈등의 골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로 이해를 못했다. 아빠는 딸에게 정상을 요구했고, 딸은 아빠에게 ‘그것만이 꼭 정상이냐?’ 되물었다. 결정적으로 그녀가 아이가 갖고 싶다고 미혼모가 되어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서로를 향한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가족, 뭘까? 영화 포스터의 카피가 생각난다. 

누구나 집에 오면 가족이 된다.

   따뜻한 말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불온하기 그지없다. 모름지기 가족이란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한다.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이다(요즘은 여기에 입양을 통한 구성원도 추가한다.). 아무튼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정상이라 여기는 ‘가족’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 왜 감독은 저런 불온한 말을 남겼을까? “누구나 집에 오면 가족이 된다.”고.

가족, 뭘까?

   이 물음에 대한 실마리를 잡기 위해선 다른 각도에서 가족을 바라봐야 한다. 가족의 개념은 누가 정한 것일까? 요즘 흔한 ‘핵가족’의 형태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시기는 언제일까? 가족의 개념과 범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는 않았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안다. 조금만 자료를 찾아봐도 안다. ‘가족’은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면서 자연스레 우리의 세계관 또한 변했다. 기존의 세계관으로는 도저히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 많아졌다. ‘가족’이 대표적이다. 사실 핵가족의 역사가 그리 깊지 않다. 우리나라만 봐도 그렇다. 2-3세대를 넘어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응당 ‘정상 대 비정상’의 프레임 또한 달라져야한다. 무엇이 ‘정상’이고, 어떤 것이 ‘비정상’이란 말인가? 이렇게 따지는 것은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가?

   [마이 플레이스]는 문칠의 여동생을 가족이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문칠, 아빠, 엄마 모두 ‘나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동안은 사회가 규정한 자리를 ‘나의 자리’로 알고, 거기에 맞추라고 여동생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그들도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여동생이 꿋꿋하게 자신의 세계관과 철학을 이야기하고, 끝까지 굽히지 않는 것을 보면서, 가족들은 그녀를 인정하기 시작한다. 진심이 통한 것일까? 물론 그녀의 아들 ‘소울’이의 영향이 컸다.

소울이를 예뻐하는 가족들

   소울이는 미혼모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이다. 남들 다 있는 아빠가 없지만, 할아버지와(문칠 아빠) 삼촌(문칠) 그리고 할머니(문칠 엄마)가 그 빈자리를 채워주기에 밝게 잘 자란다. 영화 말미에 문칠이 말한다. “이 세상에 단 하나 자기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동생은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닐까” 소울이는 문칠 여동생(소울이 엄마)의 동반자이며, 소울 메이트이다. ‘집에오기만 하면 반겨주고, 받아주는 가족’이 바로 소울이와 문칠의 여동생이다.

이 세상에 단 하나 자기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동생은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닐까?
소울이와 함께

   다시한번 묻고싶다. 가족, 뭘까? 정상 가족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감독이 영화에서 집요하게 파고드는 지점이 이것이다. 우리는 과도하게 ‘정상 대 비정상’을 구분하는 프레임에 갖혀 살아간다. 인생은 ‘나의 자리’를 찾는 여정일진데, 심지어 ‘나의 자리’마저 정상이라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놓고 고민한다. ‘비정상’이라 생각되는 길을 걷기를 꺼려한다. 그래서 남들이 말하는 ‘정상’, 사회가 요구하는 ‘보통’에 남아 있으려한다.


   그렇다고 문칠의 여동생이 아무 기준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편하게 사는 것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그녀는 그녀만의 분명한 기준이 있다. 그녀가 생각하는 ‘관계’에 대한 정의가 뚜렷하다. 그리고 그 관계를 온 맘 다해 사랑한다. 그녀의 행동을 놓고 단순히 ‘관습을 해체’하자는 식의 해석은 곤란하다. 오히려 영화는 ‘보편성이 줄 수 있는 폭력’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 함부로 ‘이것이 정상이다.’, ‘이것이 가장 보편적이다’라고 단정 짓지 마시라. 거기서 배제되는 이가 생각보다 많다.


   사회는 갈수록 다양해지고 복잡해진다. 다원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는 여전히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빠져 누군가의 삶을 ‘정상인가? 비정상인가?’라고 논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가족은 성별, 계층, 연령, 지역, 혼인 상태, 가족구성, 성적 지향 등에 따라 매우 다르게 경험될 수 있다”((사)한국여성연구소 엮음, 『젠더와 사회』, 동녘, 304)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가 일방적으로 규정한 ‘정상의 자리’에 나를, 남을 억지로 구겨 넣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문칠과 여동생은 캐나다에서 '다양성'을 몸에 익혔다

   다시 ‘나의 자리’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오자. 마이 플레이스를 찾는 것이 인생이라 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마이 플레이스를 만드는 것, 개척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와서 나를 다 아는 것처럼 ‘당신 자리는 여기야. 여기야 말로 당신이 찾던 자리야’라고 한다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당연히, ‘저를 아세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요? 이 자리는 저와 맞지 않아요.’라고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


   이 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은 그저 하나의 숫자로 환원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안엔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이루는 ‘이야기(narrative)’가 있는 것이다. 그 사람만의 고유한 이야기, 곧 ‘기억(memory)’이 그 안에 있다. 어떻게 함부로 그 사람만의 이야기를 ‘정상이냐? 비정상이냐?’고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오만하고, 고압적인 태도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자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문칠의 여동생이 ‘참 강하다’는 생각이 들기만 했다. 대단하다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난 뒤 다시 생각해보니, 그녀의 속사정에 감정이 이입됐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간절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겐 ‘가족’이 필요했다. 그녀의 생각과 세계관을 인정하고 받아줄 수 있는 가족 말이다. 그러한 가족과 진한 사랑을 나누고 싶었을게다. 소울이는 그녀에게 정말 간절한 존재였다.

영화 [마이플레이스]의 문칠네 가족

   이 땅에 ‘정상이라는 것과 저항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로 위로를 건네고 싶다. 분명 문칠의 여동생의 삶을 통해 위로를 받으리라. 또 오늘도 ‘나의 자리’를 찾고, 개척하고 있는 나의 많은 벗들에게 이 영화를 선물하고 싶다. 우리는 사회가 규정한 ‘그것’말고 우리가 상상하는 ‘이것’을 향해 갈 수 있다. 굳세어라 사람이여. 세계여. 이야기여. 기억이여.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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