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언자 Oct 24. 2018

희생양 매커니즘

우리 사화의 희생양 만들기, 그 잔혹함에 대하여

사람은 누구나 꽁꽁 감추고 싶은 내면의 사악함, 추잡함 따위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유년시절의 불우함에서 비롯된 상처라고 하든, 내면의 아픔이라고 포장하든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건 그 사악함의 내용이 무어냐가 아니라, 자신의 '그것이' 드러날까 두려워 누군가를 제물로 삼는 잔악함이다. 자신의 가면이 벗겨질까 두려워 타인의 시선을 나 아닌 타자에게 옮겨가게끔 하는 행위. 우리에겐 이젠 익숙해지기까지 한 뒷담화, 왕따, 조리돌림, 마녀사냥 등등.


해서, 타인을 쉽게 적으로 돌리고, 친구나 공동체의 유대에 과도한 집착을 하는 사람일수록 거리를 두고 유심히 지켜봐야하는 사람들이다. 그네들이 강조하는(강조라 하고 강요라 읽는다) 인간관계는 기껏해야 '내 편 만들기'의 다름 아니며, 그 견고한 울타리에 들지 못하는 이방인은 쉽게 괴물이되고, 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친구, 동료, 내 편 등에 대한 과도한 집착 이면에는 그가 숱하게 자행한 행위, 곧 '적 만들기', '괴물 만들기'가 언젠가 자기 자신을 향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거리를 두고 지켜본다는게 쉽지 않다. 누군가를 제물로 삼아 조리돌림 하는 공동체 내에는 그네들이 자발적으로 취하는 '집단적 우월감'이 존재한다. (물론 그 우월감 이면엔 참을 수 없는 '열등의식'이 존재하겠지만) 이 우월감은 그들의 자의식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면의 추잡한 모습을 자기 스스로 객관화 할 수 있는 능력을 점차 무뎌지게 한다. 그 능력이 이른바 양심인데, 비근한 말로 '양심이 없다'는 말의 모양새가 바로 이것이다.


누구나 내면에 감추고 싶은, 드러내서는 안될 것이 있기에 우린 평생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쉽게 말해서 늘 우린 남을 속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 가면은 내가 아니라는 것. 백번 양보해서 나의 한 부분, 또는 일부일 수 있겠으나, 그것이 곧 나 자신은 아니다. 이 뻔한 사실을 늘 주지하고 있을 때, 곧 양심을 끝까지 움켜쥐려 할 때 나를 포장하기 위해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피의 굿판'을 멈출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주변에 만연한 그 죽음의 굿판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칼날처럼 꽃잎처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