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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 어때 May 24. 2024

빨래를 개다가 문득

생각 개기

세상은 점점  빠르게 변하고 있다. 가히 빛의 속도라 할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어 내 성장속도로 따라가기에는 뱁새가 황새 쫒다가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이 딱 맞을 정도로 버거운 지경이다.  얼마나 편리해지고 황홀한 세상이 올까를 상상하면 오래 사는 수밖에 없다. 좋기만 하다는 대전제하에. 멀리 갈 것도 없이 엄마의 이야기만 들어봐도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엄청나게 편리한 세상이다. 사람은 시절을 잘 타고나야 한다는 아쉬움 섞인 아버지의 푸념소리가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도 20대에 비하면 30대가 조금 더 나아졌고 40대인 지금은 전보다 훨씬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다. 기계적, 물리적인 측면에서의 놀라운 발전은 나를 집안일에 찌들지 않는 주부로 만들어 줬음에도 한 발 더 나아가는 욕심을 부린다.


3대 이모님이라 불리는 것들이 있다. 식기세척기, 건조기, 로봇청소기를 이르는 말이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사람을 왜 아무도 고모님이라 부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잠시 스치듯 하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 본다. 식기세척기를 들이고 식사 후 설거지를 누가 할지 가위바위보 따위 하지 않는다. 내 시간이 많아진 느낌에 고마웠는데 이제는 뽀득해진 그릇정리하는 것이 귀찮아졌다. 이럴 수가. 설거지 다 해줬더니 누가 식기 정리까지 싹 해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어 웃음이 났다. 나란 인간. 참.

건조기를 들인 후 신세계가 열렸다. 침대커버 및 이불세트를 빨아서 바로 다시 씌울 수 있다. 빨래를 거실에  널어놓고 손님 오면 건조대를 안방으로 숨겨놓는 일은 안 해도 된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내가 버튼만 누르면 뽀송해져 나온다. 이럴 수가. 빨래 다 해줬더니 누가 좀 이쁘게 개서 옷장에 정리해 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로봇청소기는 또 어떤가. 주인님 나간 사이에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청소 싹 해놨더니 물통 비우고 센서 닦는 게 귀찮다니.  인간의 귀찮음 혐오가 기계의 발달을 가져왔다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너무한 생각 계속하다 보면 조만간 각 집에 AI로봇 입주도우미가 하나씩 생기지 않을까. 

어릴 때 봤던 과학 잡지에서 미래인간이라며 사진을 한 장 봤는데 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키도 작아지고 팔다리도 가늘다. 용불용설을 명확히 보여주며 쓰지 않는 기관은 모두 퇴화되고 스크린 터치를 위한 손가락만 남아있는 사진이었다. 쓰지 않으면 그렇게 될 법도 하다. 그렇게 되기 싫으니 몸을 쓰긴 해야 하는데 일하는데 말고 노는데만 쓰고 싶은 아주 유아기적 사고를 하고 있다. 몸은 노화하는데 생각은 퇴행 중이다. 빨래를 개다 말고 욕심의 끝은 어디인가를 보여주는 잡다한 생각을 한다. 결국 합리화의 단계로 들어간다. 욕심이 발전을 가져왔다며.

인간의 욕심과 욕망은 물속에서 자동차가 달리게 하고 하늘로  사람을 실어 나르게 만들었다. 인간은 한때의 불가능을 지금의 가능으로 만드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 그렇다면 조금만 더 나아가 보자. 희로애락 중에 내가 필요한 것만 뽑아 쓰고 생로병사 중에 원하는 것만 하게 할 수는 없을까. 아무도 안 뽑아 쓰는 인기 없는 것들은 퇴화되어 소멸되는 것이다.  빨래를 개다 훅 들어온 생각을 적다 보니 역시 문득 든 생각은 실현불가능 한 것들이 태반이다. 다행일 수도 있다. 사실 문득  찾아오는 생각들은 긍정보다는 부정, 기쁨보다는 걱정과 불안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면 실현 안 되는 것이 감사한 일이 되기도 한다. 문득 훅 들어오는 안 좋은 생각은 미련 없이 후딱 털자. 쓸데없는 생각도 고이 개서 안 보이는 깊은 곳에 넣어두고 남은 빨래나 마저 개야겠다.


생각도 갤 수 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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