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게 찍어주세요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이자 갑상선 수술을 위한 첫 검사로 목과 머리 ct 찍는 날이다.
ct는 꽤 많이 찍어봤지만 저녁 촬영은 처음이다. ct실 가능한 시간이 저녁 6시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외래든 검사든 아무튼 병원 가는 날은 불안과 떨림이 미세하게 지속된다.
아침에 후딱 찍었어야 했는데 저녁까지 이런 진동을 안고 있자니 답답했다. 병원을 생각하면 억압된 불안이 트라우마가 되어 터져 나온다. 꼭꼭 눌러 저 깊은 안쪽에 처박았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문을 열고 밀려 나온다. 못 본 척 회피해 보기도 하지만 간헐적 쿵쾅거림이 반복된다. 설렘이나 떨림이나 불안이나 두근거리는 건 매한가진데 이렇게 다른 느낌이라니.
촬영시간인 6시까지 시간을 확 빠르게 당기는 방법은 바쁜 일상을 보내는 것이다. 일단 몸을 쓰자. 골프백 들고 연습장으로 갔다. 뭐라도 휘두르면 좀 스트레스가 풀릴까 싶고 좋아하는 것 하면 시간도 잘 가니까.
6시에 빨리 도달하는 첫 번째 방법으로 골프를 택했다. 두 시간을 후딱 써버리고 점심 먹는데 한 시간을 썼다.
오후 스케줄도 잡아놨다. 아파트 커뮤니티 작은 도서관 사서봉사 두 시간도 하기로 했다.
몸을 썼으니 책들 사이에서 머리를 좀 식혀보고자 했으나 현실은 귀여운 꼬맹이들과의 시간을 보냈다.
"선생님, 이거 복사해 주세요"
"선생님, 흔한 남매 7권 없어요?"
뭐 가르쳐 주는 것도 없는데 꼬맹이들은 이곳에서 나를 선생님이라 부른다. 그렇게 귀여운 어린이들의 선생님으로 또 두 시간을 썼다.
일주일에 몇 시간씩 도서관 봉사를 하고 있는데 오늘은 도서관이 나에게 봉사했다. 나의 불안과 걱정을 두 시간 동안 잊을 수 있게 도와줬으니 최고의 봉사를 해준 셈이다.
이제 슬슬 촬영장으로 갈 준비를 한다. 매니저를 앞세워 촬영 나가는 배우처럼 출발!!!
고작 4시간 금식인데 2시부터 왜 이리 목은 마른 건지. 하지 말라고 하는 순간부터 하고 싶어진다. 심리적 불안이 목을 더욱 건조하게 하고 있다.
촬영장에 도착했다. 병원이라 쓰기 싫다. 촬영장으로 하자.
저녁 시간에도 왜 이리 사람이 많은 걸까. 나 혼자가 아니라며 위안 삼아야 하는 건지, 안타까워해야 하는 건지 헷갈리는 순간이다.
촬영복으로 갈아입고 조영제가 들어갈 바늘을 꽂기 위해 주사실 앞에 줄을 선다. 항암치료를 한 환자들은 대부분 혈관이 많이 약해지고 잘 숨는다. 그래서 나는 조영제 들어가는 바늘을 손등 쪽에 꽂는다. 조금 아프지만 참을만하다. 숨은 혈관을 잘 찾는 숙련된 베테랑 간호사님을 만나면 한결 수월하게 진행된다.
주삿바늘을 손등에 꽂고 CT실 앞 의자에 앉아서 대기하다가 이름을 부르면 들어가 기다란 통에 눕는다. 잠시 잠깐동안 오만가지 생각을 하다가 조영제가 들어오는 따뜻한 느낌에 바짝 긴장하다 보면 어느새 끝이 난다. 휴. 숙제하나를 끝낸 느낌이다. 앞으로 또 많은 검사가 있지만 오늘의 촬영은 여기까지다.
촬영장까지 운전하고 까다로운 배우 비위 맞추느라 수고한 나의 매니저, 남편과 맛있는 히츠마부시를 먹었다.
병원 다녀온 날은 무조건 맛있는 것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토닥여줘야 한다. 그게 매니저의 역할 중 하나다. 배우보다 늘 더 긴장하고 신경 써주는 매니저 덕분에 오늘의 촬영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잡히는 스케줄이 좀 즐겁고 행복할 수만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좋아하는 스케줄만 소화하고 살 수는 없다는 걸 금방 받아들인다.
'뭐 어떻게 좋아하는 것만 할 수 있겠는가.'
'때론 싫은 것도 해야 하고 버텨야 할 때도 있는 거지.'
'대배우가 되려면 그래야겠지.'
그래도 다음에는 가능하면 오전에 촬영하는 게 좋겠다. 야간촬영은 배우가 힘드니까.
그나저나 부디 촬영이 잘 돼서 예쁜 결과물이 나왔으면 좋겠다. B컷 없는 A컷으로.
갑상선마저 예쁘면 어쩌지. 실없는 소리로 오늘의 긴장을 풀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