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매화문화축제를 다녀와서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
-김용택, 봄날
계절은 온도의 문제가 아니라 믿는다. 가지에 돋는 잎의 수로도 봄 여름을 계량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계절은 문득 맞은 바람에서, 갑자기 머리를 스친 그 사람을 건너 찾아온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그래도 봄은 다시 오는가 보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광양으로 내려가는 길에 차 안의 공기는 점점 따뜻해지고,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를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잠에서 깬 사람들은 창가에 바짝 붙어 강가의 매화꽃을 넋 놓고 바라본다. 내리는 순간 밀려오는 봄의 향기. 이맘때에 불어오는 향기는 어떤 꽃에서 풍겨온다기보다는, 봄에만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에 가까운 것 같다. 광양에선 벌써 그러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백만 그루 매화나무엔 꽃이 피고 있었다.
봄나물을 팔고 계신 아주머니께 안내를 받아 서둘러 마을버스에 올라섰다. 매화꽃을 보고픈 마음에 잔뜩 들뜬 상춘객들로 가득하다. 매년 이 곳을 찾아오신다는 한 할아버지의 매화마을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너머 달리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드디어 마주하게 된 광양 매화마을.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그려준 꽃밭보다도 조금 더 아름다웠다.
섬진강을 따라 매화가 피어있는 매화로는 산을 따라 들어선 매화마을보다 볕이 잘 드는 곳이다. 때문에 축제가 벌어지는 마을보다 오히려 만개한 꽃이 많다. 매화로의 오른쪽엔 섬진강이, 왼쪽엔 매화꽃이 만발하고 있는 매실 밭이 있다. 자꾸만 발걸음을 멈춘 채 좌우로 고개를 움직이게 한다. 하늘엔 줄지어 날아가고 있는 새들이, 물 위엔 봄바람과 함께 흘러가는 꽃잎들이, 눈앞엔 눈부시게 하얀 매화꽃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봄을 반기려 활짝 핀 꽃만큼이나 누구보다 먼저 봄을 맞으러 온 사람들. 매화마을 축제에 들어섰음을 알려주는 별다른 표지판은 없다. 봄을 즐기러 온 사람들의 노랫소리야말로 축제장소에 왔음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본래는 ‘섬진마을’ 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이 마을은, 대규모 매실 농원이 들어서고 매년 3월에 매화축제를 열자 매화마을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한 때는 매실로 더 유명했던 마을이니만큼 마당 가득 매실로 찬 장독대는 정겨움을 더하고, 그 사이마저 자리를 잡고 꽃을 피우는 매화의 모습은 초봄의 풍경이라기에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어쩌면 다른 나무들은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 이른 봄이기에, 매화꽃의 아름다움은 유독 더 빛나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매화마을 축제에는 특별하게 즐길 거리가 있는 것도, 또 다른 축제의 주인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매화꽃이 가득한 산책로를 따라 거닐다 마음에 드는 곳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상춘객들이 매년 이 매화마을을 찾는 이유는 그 자체로 축제라 할 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매화꽃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매화 터널을 고개 숙여 지나보기도 하고, 일행과 손을 잡고 산책로를 오르다보면 겨우내 떨고 있던 몸에 봄기운이 퍼지는 걸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매화마을에선 나이가 지긋한 노부부도 갓 사랑을 시작한 연인이 되고, 일상에 지친 어른들도 바닥에 앉아 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이가 되는 듯 했다.
매화꽃이 피면
그대 오신다고 하기에
매화더러 피지 마라고 했어요
그냥, 지금처럼
피우려고만 하라구요
-김용택, 매화 中
매화마을 꼭대기에 올라 매화꽃과 섬진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러한 풍경을 시로 담은 시인 김용택이 떠오른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섬진강과 매화꽃을 바라보며 글을 써내려갔을 그는 왜 매화꽃에게 피려고만 하라고 하였을까. 그는 아마도 매화꽃을 보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매화꽃을 사랑하고, 봄을 기다려온 사람이기에 매화더러 피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매화가 피면 그대가 오신다고 했기에, 매화꽃이 만발하면 봄은 기어코 오는 것이기에, 그는 그 기다림의 설렘을 잃고 싶지 않았나보다. 봄이 오길 손꼽아 기다렸던 우리의 마음을 그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봄이 와 있다
잔디밭에 봄이 와있다
어 어 저것 봐
저 햇빛 좀 봐
매화가지 끝에 꽃망울이 터지잖아
내가 나를 배반할 것 같은 봄이
나는 무섭다.
-김용택, 배반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찾다가 없거든 섬진강 따라 매화꽃을 보러 간 줄 알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봄은 왔고, 또 봄은 지나가기 마련이다. 김용택 시인처럼 매화더러 피우려고만 하라고 할 수 없다면, 하루라도 빨리 봄을 즐기러 이 매화마을을 찾아보자. 지나가는 봄은 아쉬워도, 마을 가득히 퍼지는 매화 향기와 발 앞에 떨어지는 매화 꽃잎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