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중년의 게임 유튜버가 올린 영상을 보았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게임을 즐기는 그는 꽤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의 교육관을 피력했다. 그는 자기 아이에게 "책 좀 읽으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부모가 아이에게 책 좀 보라고 잔소리하는 것은, 결국 아이가 책을 통해 다양한 간접 경험을 하고 지혜를 쌓기를 원하는 부모의 마음일 것인데, 과거에는 책이 그 지혜를 얻는 유일한 통로였다면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이제는 책을 대신해서 게임 속 거대한 세계관을 스스로 탐험하고, 승리를 위해 치밀하게 전략을 짜며, 낯선 이들과 협력하여 난관을 돌파하는 모든 과정은 그 자체로 책 읽기 이상의 가치를 지닌 능동적 경험이 될 수 있으므로 책을 읽으라고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나도 인생의 반평생을 게임과 함께해온 사람으로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갸우뚱 해지는 부분이 있다. 그의 의중은 분명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정보가 빛의 속도로 흐르는 시대에 지식은 더 이상 낡은 종이 냄새 풍기는 텍스트에만 머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가 강조한 경험의 가치 뒤에 숨은, 혹은 우리 시대가 너무나 쉽게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를 어느 지점 하나를 덧붙여보고 싶어졌다.
그것은 바로 경험의 내재화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요즘 너무 많은 것을 본다. 유튜브의 수 많은 영상들, 끊임없이 쏟아지는 숏폼 콘텐츠, 그리고 눈을 현혹하는 화려한 그래픽의 게임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경험의 시대를 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빈곤한 자아를 마주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닐까?
경험이라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한 자양분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특히 게임이나 영화처럼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흘려보내는 간접 경험은 더욱 그렇다. 그 유튜버가 말한 전략과 협력도 그것이 진정한 지혜와 성장의 밑거름이 되려면, 반드시 흘러가는 경험을 내면의 호수에 고이게 하고 내재화라는 가혹한 필터링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필터의 이름은 ‘사색’이다.
잠시 바깥을 향하던 감각의 창을 닫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
내가 겪은 일들이 나의 가치관과 어떻게 융합하고, 충돌하는지, 그 파편들이 내 삶의 어떤 지점에 내려앉는지를 가만히 지켜보는 고독한 대화다. 결국 사색은 경험이라는 원재료를 지혜라는 영양분으로 바꾸는 ‘정신적 소화’ 과정인 셈이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꿀벌을 흉내 내야 한다고 말이다. 꿀벌은 이곳저곳 날아다니며 꽃가루를 모으지만, 그것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자신의 몸 안에서 정교하게 섞고 변화시켜 비로소 달콤한 꿀로 만들어낸다.
우리가 겪는 수많은 경험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사색이라는 효소가 결여된 경험은 그저 우리 뇌를 잠시 스쳐 과거 속에 버려두고 지나가는 전기 신호의 파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음식을 먹는 행위와 영양분이 몸에 흡수되는 과정의 차이를 생각해 보자. 아무리 값비싼 산해진미를 먹어도 위장이 그것을 분해하지 못하면 몸에 이로운 영양분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소화되지 못한 채 몸을 무겁게 만들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지식의 체기 또한 이 지점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너무 많이 먹어서가 아니라, 제대로 씹지 않아서 발생하는 문제 말이다.
여행이라는 경험을 예로 들어보자. 많은 이들이 더 먼 곳으로 떠나고, 더 이질적인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 더 큰 성장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마치 훈장을 수집하듯 비행기 티켓을 모으고, 남들이 가보지 못한 험지를 찾아간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여행 커뮤니티의 추천 경로를 따라 유명한 관광지를 '훑고' 지나온 화려한 여정과, 비록 이름 없는 국내의 작은 마을일지라도 그곳의 역사를 조용히 되짚고 낯선 이의 고단한 삶을 마주하며 스스로의 내면과 대화해온 여정 중, 과연 어느 쪽이 영혼에 더 깊은 무늬를 새길까.
유럽의 하늘에 뜬 노을을 보고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장 올리는 것으로 끝낸다면 그것은 그저 풍경의 소비에 가깝다. 반면, 국내의 낡은 간이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빛바랜 의자에 새겨진 누군가의 낙서를 보고 그 삶의 고독을 상상해본다면, 그것은 내면을 채우는 사색의 재료가 된다. 경험의 영양가는 얼마나 멀리 갔느냐가 아니라, 그 경험을 얼마나 깊이 되새김질했느냐에 달려 있다.
여행으로 지혜를 얻으려 한다면 필요한 것은, 장소의 위도가 아니라 생각의 심도다.
어떤 경험이든 내재화를 이룬 후에야 비로소 내 삶을 성장시키는 영양분으로 활용될 수 있다. 사색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이내 파편화되어 흩어지지만, 사색을 통과한 경험은 비로소 하나의 '맥락'으로 엮이고 본질로 수렴된다.
예를 들어, 여행 중에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시골로 향할수록 점차 맑아지는 공기와 하늘의 푸른빛을 가만히 사색해본 사람은 단순히 '경치가 좋다'는 감상을 넘어선다. 그는 인위적인 밀도가 낮아지고 소음이 사라질수록 본연의 순수함이 드러난다는 인과관계를 체득한다. 이러한 사색은 훗날 그가 완전히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복잡함이 만들어내는 노이즈를 걷어내면 어떤 핵심적인 본질이 드러날지 예상하는 통찰력으로 치환된다. 현상의 원인을 깊이 파고들어 본질을 이해한 사람만이, 낯선 문제 앞에서도 올바른 인과를 설계하고 맥락을 짚어낼 수 있다.
반면 내재화되지 못한 경험은 그저 일회성 이벤트로 증발하기 쉽다. 수백만 원을 들여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왔어도 그저 해외에 있었다는 사실만 남을 뿐, 그곳에서의 고립감이나 문화적 충격을 자신의 삶과 연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지식이 되기 어렵다. 연결되지 않는 점들은 결코 선이 될 수 없고, 선이 되지 못한 삶은 입체적인 면을 이루지 못한다.
혹자는 반문할지도 모른다. 사색할 거리라도 있으려면 일단 많이 겪어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재료만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요리할 줄 모르는 요리사의 주방을 상상해보라. 그 재료들은 결국 요리가 되지 못한 채 상해버릴 뿐이다. 경험이 재료라면 사색은 불이다. 불이 없는 주방에서 재료의 양만을 늘리는 것은 공허한 일이다.
현대 교육학의 아버지 존 듀이는 경험 그 자체가 교육이 아니라, 경험을 되돌아보고 의미를 부여하는 반성적 사고가 성장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친구와의 사소한 대화, 여행지에서 마주친 낯선 풍경, 심지어는 게임 속에서 겪은 패배조차도 사색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매체의 종류나 경험의 규모가 아니라, 멈춤의 유무다.
우리는 정보를 소비하는 속도에 매몰되어, 정작 그 정보가 우리 영혼에 어떤 무늬를 남기고 있는지 살필 시간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지 우려된다.
다시 그 유튜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나는 그의 주장을 이렇게 고쳐 불러보고 싶다. 이제 책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그 경험이 당신을 단 1mm라도 성장시키길 원한다면, 반드시 사색이라는 보이지 않는 노동을 묵묵히 마주해야 한다고 말이다.
사색은 단순히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경험이라는 거친 원석을 깎아내어 지혜라는 보석을 만드는, 가장 능동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경험의 양보다 경험의 질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질은 우리가 얼마나 고독하게 그 경험을 짓씹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사색을 통해 내재화된 경험만이 삶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를 바로 보는 힘을 키우고, 과거의 조각들을 현재의 맥락과 연결하여 미래를 예견하는 지혜가 된다.
오늘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는가.
게임으로 친다면,
그 화려한 화면을 끄고 난 뒤에 찾아오는 그 정적 속에서, 진짜 나의 생각이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