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내가 카뮈를 처음 만난 건 군대 병장 시절이었다. 내무실 책장을 뒤적이다 『시지프 신화』라는 얇은 책을 발견했는데, 평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좋아했던 터라 '시지프'라는 이름에 이끌려 집어 들었다. 두께도 얇으니 금세 읽히겠지 싶었다. 하지만 무슨 소린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악물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한 달 내내 읽었음에도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도 모른 채, 그로부터 벌써 수십 년이 흘렀다.
『이방인』은 워낙 유명하였지만, 이미 '시지프'에 한번 고생을 한 나로서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우연한 계기로 드디어 펼쳐 들었다. 그리고 다 읽고 났을 때, 역시 주인공의 감정에 전혀 이입이 되지 않았고 내용도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 작품이 그토록 유명한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다시 또 이 악물고 일주일에서 이 주일 정도 꾸준히 곱씹으며 책을 두 번 반복해서 읽었다. 그 끝에 어제 겨우 무언가 걸리는 것이 생겼다. 사실 지금 이 시점에도 내가 이 소설을 이해는 한 것인지? 오독은 아닌지 모르겠다. 카뮈의 사상은 나에게는 여전히 어렵긴 하다. 그러나 오독이면 오독한 대로 그 가치가 있기에 오늘 이 후기를 남긴다.
소설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라는, 너무나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1인칭 서사다. 주인공 뫼르소는 직장인이다. 선화증권을 다루는 장면으로 미루어 무역 회사나 선박 회사에 다니는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의 직업이 무엇인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는 삶에 대해 지독할 정도로 무미건조한 태도를 취한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거나 "나와는 상관없다"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그를 지배한다.
'이방인'이란 단순히 외지인을 뜻하는 게 아니다. 지역적인 구분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사고방식의 차이가 아닐까? 외형이나 피부색, 언어보다도 남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한다면, 그 존재 자체가 이방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
뫼르소의 이방인스러운 면모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배경은 알제리지만 뫼르소의 국적은 프랑스로 보이고, 당시 관습상 상주로서 지켜야 할 예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요양원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슬픔이나 기본적인 감정 표현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관리인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이 좋아하는 밀크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권하거나 피울 뿐이다.
슬퍼하는 기색 없이 일관되게 무심한 그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의 눈에 고스란히 새겨진다. 일반적인 시선에서 보자면,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아무런 감정 동요가 없는 그의 모습은 마치 현대의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처럼 비치기도 한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은 마침 주말이었다. 그는 알제리 해변으로 수영을 하러 갔다가 예전 직장 동료인 마리를 만난다. 두 사람은 해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코미디 영화를 함께 본 뒤, 잠자리까지 같이하게 된다. 요즘 식으로 치면 썸을 타는 관계인데, 사귀는 사이도 아니면서 자연스럽게 육체적 관계를 맺는 점이 독특하다. 이후 마리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뫼르소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라고 덤덤하게 대답한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아파트 이웃 중에 '레몽'이라는 건달 같은 남자가 있는데, 그는 자신의 아랍인 정부에게 복수하고 싶어 한다. 여자를 인격체가 아닌 물건으로 보는 부류인 그는, 아주 감동적인 편지를 써서 여자를 유인한 뒤 관계를 맺고 마지막에 뺨을 때려 쫓아내겠다는 유치한 계획을 세운다. 레몽은 뫼르소에게 편지 대필을 부탁하고, 뫼르소는 별생각 없이 그 부탁을 들어준다. 이 일을 계기로 둘은 일종의 친구 같은 사이가 된다.
작전대로 여자가 찾아왔지만, 그녀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레몽에게 달려들며 저항했고 결국 레몽이 폭행을 가해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진다. 레몽은 연행되지만, 뫼르소는 경찰서에서 레몽 편을 드는 진술을 해준다. 이 일로 둘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지는데, 사실 이 사건은 소설 전체에서 가장 거대한 전환점이 된다.
나는 내 글에서 영화나 책의 줄거리를 이토록 세세하게 읊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굳이 길게 줄거리를 나열하는 이유가 있다. 『이방인』을 조금 이해하려면 이 일련의 사건들을 되도록 정확히 기억하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대체 왜 이렇게 행동하고 말하며 그토록 무미건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사랑하는 연인에게는 무관심하면서 육체적 쾌락에는 반응하고,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는 담담하면서 밀크커피와 담배 한 개비에는 집착한다. 장례를 마친 직후 회사 일은 뒷전인 채 해변으로 수영을 하러 가고, 이웃인 레몽의 나쁜 의도를 빤히 알면서도 거절 없이 범죄에 가까운 일을 돕는다.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90% 이상은 아마도 나와 비슷하게 뫼르소를 결코 정상적이지 않은, 아주 이상한 존재로 느끼지 않을까? 혹자들은 이것이 카뮈가 바로 그렇게 의도한 바라고 해석을 한다.
어느 날 레몽은 뫼르소와 마리를 해변의 별장으로 초대한다. 그렇게 모인 젊은 남녀들이 모여 수영을 하고 음식을 먹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던 중, 남자들끼리 해변을 걷다가 일단의 무리와 마주친다. 그중에는 레몽에게 폭행을 당했던 아랍인 여자의 오빠가 섞여 있었다. 레몽에게 여동생의 복수를 하러 온 그들과 몸싸움이 벌어졌고, 레몽은 아랍인이 휘두른 칼에 맞아 얼굴과 손에 상처를 입는다. 그들이 도망을 하고, 잠시 근처 의사 집에 들러 치료를 마친 레몽은 권총을 품에 넣고 다시 그들을 찾아 나선다.
멀리 가지 않은 곳에서 다시 아랍인들과 마주쳤을 때, 레몽이 총을 쏘려 하자 뫼르소는 이를 만류한다. 뫼르소는 총을 쏘는 건 "남자답지 못하다"라는 핑계를 대며 레몽에게서 총을 건네받아 상황을 일단 진정시킨다.
소동이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뫼르소는 묘한 피로감과 열기를 느끼며 홀로 해변을 걷게 된다. 강렬한 태양 아래 어지러움을 느끼며 바닷가 끝 샘물을 향해 걷던 중, 공교롭게도 아직 그곳을 떠나지 않고 혼자 있던 아랍인과 다시 마주친다. 잠깐의 대치 정적 후, 아랍인이 칼을 꺼내 드는 순간, 알제리의 강렬한 햇빛이 칼날에 반사되어 뫼르소의 눈을 찔렀다. 그 빛이 마치 이마를 뚫고 들어오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뫼르소는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쓰러진 아랍인을 향해 네 발의 총을 더 쐈다.
배경은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다. 가해자인 뫼르소는 프랑스인이고, 피해자는 아랍인이다. 게다가 아랍인은 이미 그날 레몽을 먼저 공격한 전적이 있었고, 뫼르소 앞에서도 칼을 꺼내 들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정당방위나 과실치사, 혹은 과잉방위 정도로 충분히 참작될 여지가 있는 상황이다. 당시 식민지라는 시대적 배경까지 고려하면 뫼르소가 그리 무거운 형벌을 받을 거라고는 누구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 일로 뫼르소는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대중들이 이 소설을 기억할 때 흔히 떠올리는 건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는 첫 문장이나, "태양빛이 강렬해서 총을 쐈다"라는 황당해 보이는 살인 동기뿐이다. 나 역시도 이런 단편적인 정보를 먼저 듣고, 소설을 접하다 보니, 뫼르소의 행위는 마치 몽환적이고 판타지스러운 은유와 같다면, 재판의 과정은 의뢰로 굉장히 현대적이고, 합리적이며, 논리와 이성적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재판 과정의 등장인물들은 비 이성적이고, 모순적이고, 논리 비약을 일삼는다. 이 지점이 독자들이 『이방인』을 불편하게 여기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재판 과정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현대적인 법정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변호사, 판사, 검사, 증인, 배심원들까지 모두 갖춰져 있다. 재판장이 뫼르소에게 가장 먼저 집요하게 파고든 의문은 살인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시간의 공백'이었다. "첫 발을 쏘고 나서 왜 잠시 뒤에 네 발을 더 쏘았는가? 그 사이에 무슨 생각을 했는가?" 하지만 뫼르소는 이에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는 애초에 자기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닫아버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소명이 없자 재판의 양상은 묘하게 흘러간다.
급기야 재판장은 사물함에서 십자가를 꺼내 허공에 흔들며 격앙된 목소리로 외친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지만 뉘우쳐야만 가능하다며, 뫼르소에게 하나님을 믿느냐고 다그친다. 앞서 말했듯 뫼르소는 타인의 눈치를 보거나 거짓을 말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담담하게 "안 믿는다"라고 답한다. 재판장은 큰 충격을 받고 흥분하며 소리친다.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몰아세우는 이 과정에서, 뫼르소는 사실상 '신을 믿지 않는 자'로 낙인찍히며 재판의 흐름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된다.
우리는 흔히 재판을 논리적인 판단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낙인을 찍는 행위는 현대적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단순히 판사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방인』을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이방인'이란, 대다수가 따르는 보편적인 가치나 신념 체계에서 벗어난 존재를 뜻하는 것 같다. 모두가 신을 믿는 사회에서 신을 부정하는 자는 그 자체로 공동체의 질서를 위협하는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재판의 비논리성은 검사의 심문에서 절정에 달한다. 검사는 살인 사건의 본질과는 무관한 뫼르소의 사생활, 특히 어머니 장례식에서의 행적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사건의 정황이 명확하니 범행의 '의도'나 '인격'을 심판하겠다는 논리다. 검사는 뫼르소가 어머니를 직접 모시지 않고 요양원에 보냈다는 점, 임종을 지키지도 않았으며 장례식에서 슬퍼하기는커녕 밀크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는 점을 부각한다. 이를 통해 뫼르소를 인륜을 저버린 파렴치한 인간으로 몰아세우며, 그의 도덕적 결함이 곧 살인으로 이어졌다는 프레임을 씌운다.
소설의 1부가 뫼르소의 일상과 살인 사건을 다룬다면, 2부는 그를 둘러싼 재판 과정을 정밀하게 묘사한다. 판사는 그의 무신론적 태도에 분노하고, 검사는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으며 밀크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는 점을 들어 그를 살인마로 몰아세운다. 배심원들 역시 이러한 도덕적 프레임에 동조한다. 여자친구 마리가 뫼르소의 선량함을 증언하려 하지만, 검사는 오히려 장례식 직후 코미디 영화를 보고 즐겼다는 사실을 들춰내 그를 인간성이 결여된 존재로 매도하는 데 이용할 뿐이다.
사실 장례식에서의 행동이나 마리와의 데이트는 해변에서 아랍인을 쏜 사건과 아무런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다. 하지만 법정은 이 전혀 상관없는 요소들을 억지로 연결해 사형이라는 극단적인 선고를 내린다. 나 같은 성향의 사람들에게 이런 비논리적인 재판 과정은 현실성 없는 판타지처럼 느껴져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카뮈가 말한 '부조리(Absurdity)'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는 흔히
노력하면 원하는 보상을 얻으리라 믿지만,
삶은 종종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흘러간다.
평생 담배를 피워본 적 없는 사람이 폐암에 걸려 억울해하는 상황처럼,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합리한 일들이 우리 생에 불쑥 끼어든다. 뫼르소가 겪는 재판은 바로 이러한 '부조리'를 상징하는 거대한 메타포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어도, 혹은 사건의 본질과 상관없는 이유로 내 삶이 단두대로 끌려갈 수 있다는 그 막막한 현실. 카뮈는 재판 과정을 통해 우리가 마주하는 삶의 근본적인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방인』을 단순히 한 개인의 사례로만 바라본다면 이 소설은 결코 이해될 수 없다. 이 작품은 철저히 은유적이고 비유적이며, 상징적인 텍스트로 읽어야 한다. 해설가들이 흔히 말하는 '부조리'나 '반항' 같은 개념들이 처음에는 추상적으로만 들려 전혀 와닿지 않았다. 특히 나처럼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이미 어느 정도 내면의 중심을 잡고 있는 사람에게는, 카뮈가 던지는 질문들이 낯설고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부조리'라는 단어는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삶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합리한 상황을 정면으로 맞닥뜨렸을 때 비로소 가슴으로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조리'를 일상의 예로 설명해 보겠다. 아주 맑은 아침, 몸도 개운하고 건강한 상태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데이트를 앞두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으며 맛있는 것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상상에 부풀어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내 머릿속 한구석에는 마감이 임박한 어려운 프로젝트가 자리 잡고 있다. 혹시라도 프로젝트가 잘못되어 질책을 듣거나 지체상금을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슬며시 엄습한다.
이 불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다. 오늘 당장은 휴일이고, 내 눈앞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웃고 있다. 그러나 한 달 뒤에 벌어질지도 모를 부정적인
미래를 현재로 끌어당기는 순간,
오늘 누려야 할 실재하는 행복은
순식간에 일그러진 걱정 뒤로 가려진다.
데이트 내내 마음을 졸이고 집에 돌아와 잠들 때까지 불안해한다면, 결국 나의 '오늘'은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의 허상에 먹혀버린 셈이다. 이것이 바로 실존적 의미의 부조리다.
실제로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불확실성이 현재의 명확한 즐거움을 망가뜨리는 것. 카뮈가 뫼르소를 통해 보여주려 한 핵심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뫼르소는 철저히 '현재'에 집중하는 인물이다. 내일의 심판이나 사회적 통념보다 지금 당장 내 피부에 닿는 햇살, 목을 축이는 밀크커피, 해변의 시원한 파도라는 '현재의 감각'에만 오직 반응한다.
카뮈는 뫼르소라는 '이질적일 만큼 현재에 충만한 사람'을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미래에 벌어질 일들은 내가 완전히 통제할 수도, 발생을 막을 수도, 결과를 미리 알 수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걱정거리를 미리 끌어당겨 오늘을 망치곤 한다. 소설 속 뫼르소의 삶의 태도는 철저히 자신의 '피부'를 벗어나지 않는다. 관념이나 도덕, 타인의 평판 같은 외부적인 것들보다 자기 감각으로 직접 느끼는 실재를 우선시한다. 담배의 구수한 맛, 술의 달콤한 향기, 연인의 부드러운 살결, 수영할 때 피부에 닿는 물의 상쾌한 차가움, 그리고 강렬한 햇볕의 뜨거움까지. 뫼르소는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감각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그에게는 자신의 현재를 덮어버리려는 모든 외부적 요소들이 배제의 대상이다. 설령 그것이 어머니의 죽음이나 장례식일지라도, 자신의 감각적 실존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관습에 신경 쓰지 않고 "지금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가"에만 집중하는 그의 모습은, 일종의 극단적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보여준다.
우리는 어떤가? 지하철을 타는 순간에도 진동이나 냄새를 느끼기보다 휴대폰 속에 매몰되어 감각을 차단한다. 벚꽃이 피어도 꽃잎 한번 만져보지 못한 채 봄을 보내고, 겨우내 밤새 쌓인 눈의 뽀드득 소리 한 번 듣지 못한 채 겨울을 흘려보낸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유년기를 마비시키고, 괜찮은 노후 준비를 위해 젊음을 지워 버린다. 맛있는 밥을 먹으면서도 정작 혀끝의 감각은 놓치고, TV 속에서 시선을 가두고 있다.
하지만 뫼르소는 다르다. 그는 모든 것을 온몸으로 느낀다. 사람들이 달리기를 할 때 행복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의 가쁜 숨소리와 맥박, 피부에 닿는 공기를 오롯이 느끼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달리기 속에서 오히려 살아있음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처럼. 명상하며 자신의 숨소리와 심장 소리, 피부에 닿는 모든 감촉을 느낌으로써 멀리 있는 번민과 갈망을 떨치고 현재에 충만해지는 것처럼, 뫼르소는 그렇게 산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뫼르소에게 일상생활은 곧 '명상'이자 '마라톤'이다. 그는 매 순간 자신의 감각에 지독하리만치 집중하기 때문에, 그 외의 부차적인 것들(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관습)에 신경 쓸 여유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1부에서 보여준 그의 모든 기이한 행동들은 사실 '현재라는 실존'에 완벽히 밀착되어 살아가려는 한 인간의 순수한 모습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뫼르소에 대하여 당사자가 아닌 타인들에 의해 멋대로 해석되고 규정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검사의 유도신문, 증인들의 주관적인 기억, 배심원들의 도덕적 잣대가 뒤섞여 뫼르소라는 인간을 함부로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뫼르소가 왜 담배를 피웠는지, 어떤 마음으로 마리를 만났는지에 대해 정작 그의 목소리가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는 자기 재판의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이방인'으로 배제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더욱 부조리한 점은, 이 소외된 재판의 결과는 오롯이 뫼르소 개인이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책임지지 않는 타인들이 내린 결정으로 인해 단두대에 서야 하는 기괴한 상황. 뫼르소 역시 인간이기에 법정의 적대적인 공기에 위축되어 울컥하기도 하고, 자신을 변호해 주는 친구를 안아주고 싶은 갈망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미 그가 설자리는 사라진 뒤다. 재판장에게는 불온한 무신론자로 찍혔고, 대중에게는 패륜아로 미움받고 있고, 그 책임은 또 그 자신이 홀로 진다.
카뮈는 이 재판 과정을 통해 우리 삶의 서글픈 진실을 마주치게 할 작정이었나 보다. 나의 진실과는 상관없이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내 운명이 결정되는 일들, 즉 주체성을 상실한 채 끌려가야 하는 삶의 속성이 우리 일상에 얼마나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삶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거나 원치 않는 일들이 수시로 발생한다. 갑작스러운 사고, 뜻하지 않은 이별, 혹은 감당하기 힘든 불운이나 행운까지. 이 모든 사건이 반드시 나의 의도나 선행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외부의 힘에 의해 내 삶의 경로가 결정되곤 한다. 카뮈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합리적 기대와 비합리적 세계의 충돌'을 '부조리'라고 명명했다.
재판 과정이 그토록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약 뫼르소가 극적으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거나 숨겨둔 증인이 나타나 무죄로 풀려나는 반전이 있었다면, 이 소설은 흔한 법정 드라마에 그쳤을 것이다. 그런 극적 장치들은 카뮈가 전하려는 '부조리'라는 본질을 흐리는 잡음일 뿐이다. 카뮈는 잡음을 모두 제거하고 오직 핵심만을 보여준다.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더라도, 당신은 반드시 부조리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라는 무섭고도 굵직한 주제 말이다.
뫼르소의 재판은 그 어떤 논리나 정의로도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인생의 불합리함을 가장 순수하게 추출해낸 장치다. 현재에 매몰되어 감각적으로 살아가는 한 인간이, 어떻게 거대한 사회적 시스템과 세계의 부조리 앞에 발가벗겨지는지를 이 소설은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재판은 끝났고, 뫼르소는 단두대 처형을 앞둔 사형수가 되어 좁은 감방에 갇힌다. 생의 가장 밑바닥이자 절망적인 상황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뫼르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실존적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눈을 감고 자신이 지나온 길과 머물렀던 공간의 모든 세세한 디테일을 머릿속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나무 액자의 창살, 작은 선인장, 복도의 돌멩이 틈새 모양, 발에 닿던 마루의 질감까지. 기억을 더듬어 형상화하는 이 치밀한 상상을 통해 그는 감옥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 하루를 채워나가는 법을 터득한다.
죽음의 공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찾아온다. 복도를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자신의 감방 앞에서 멈추는 순간 단두대로 향해야 하기에,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는 극한의 두려움에 떤다. 그러나 그 소리가 감방을 지나쳐 멀어지고 집행 시간인 저녁 6시가 지나면, 그는 비로소 "오늘도 살았구나"라는 안도감을 느끼며 생의 기쁨을 확인한다.
이 처절한 고독 속에서 뫼르소는 과거 어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세상에 완전히 나쁘기만 한 삶은 없다"라는 그 말의 의미를 몸소 체험하며 공감하게 된 것이다. 비록 육체는 구속되어 사형을 기다리는 처지일지라도, 벽을 바라보며 만났던 사람들을 추억하고 사랑했던 여자의 살결을 상상하며 그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신만의 '좋은 일'들을 만들어낸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순간에도 현재의 의식 속에서 삶의 파편들을 긍정하는 것, 그것이 뫼르소가 부조리한 운명에 대항하는 마지막 방식이다.
어느 날 뫼르소의 방에 사제가 찾아온다.
사제는 그에게 하느님께 의탁하고 용서를 구할 것을 권유하지만,
뫼르소는 이에 처절하게 저항하며 분노를 터뜨린다. 자신의 삶이 신이라는 거대한 관념 아래 종속되어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제에게 일갈한다. 모든 생명에는 끝이 있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잠재적 사형수일 뿐이라고. 사제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인데, 누가 누구를 구원한다는 말인가.
그는 신을 통해 구원받기를 거부하고, 오직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긍정하겠다고 선언한다.
신의 자비라는 허상을 빌려 죽음의 공포를 회피하는 대신, 죽음이라는 명확한 한계 앞에서 자신의 생을 온전히 책임지겠다는 반항이다.
격렬한 논쟁 끝에 사제가 떠나고 나자, 뫼르소에게는 묘한 평온이 찾아온다. 타인이 강요한 구원의 굴레를 벗어던진 그는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느낀다. 그는 아주 개운하게 잠이 든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가 누리는 역설적이고도 주체적인 자유다.
감옥 생활은 단순히 형벌의 과정이 아니라, 부조리라는 궁지에 몰린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를 상징한다.
삶의 극한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육체적 자살이다. 하지만 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것이기에 고려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둘째는 신에게 의탁하는 '철학적 자살'이다. 현재의 고통을 내세의 구원으로 보상받으려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사제 앞에서 뫼르소가 격렬하게 분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관념적인 신앙에 기대어 자신의 실존을 지워버리는 행위를 거부한 것이다.
결국 남은 길은 오직 하나, '반항'이다.
뫼르소는 감옥 벽의 벽돌을 세고 과거의 기억을 치밀하게 재구성하며 그 절망적인 시간 속에서도 기어이 즐거움을 찾아낸다. 타인에 의해 사형수라는 부조리한 궁지에 몰렸을지라도, 그는 이 운명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며 "어떤 삶에도 나쁜 것만은 없다"라는 긍정의 태도를 유지한다. 이것이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다.
뫼르소는 카뮈의 분신도, 단순한 사이코패스도 아니다. 그는 현재를 충만하게 살던 인간이 부조리를 만났을 때, 어떻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반항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거대한 은유 그 자체다.
카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나는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다만, 아직은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 같다.
나는 뫼르소를 조금은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동의할 수는 없다. 그는 현재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결국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단두대에 올려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의 감각에 집중하는 삶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그로 인해 삶 전체를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과연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현재를 살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대비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우리는 정작 자신의 피부에서 멀리 떨어진 것들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타인의 평판, SNS의 '좋아요' 숫자, 월급의 액수,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집과 차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관념적인 가치들에 매몰될수록 우리는 정작 내 피부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햇살, 샤워할 때 몸을 적시는 물기, 달릴 때 느껴지는 가쁜 호흡과 심장 박동, 산책길에 코끝을 스치는 풀 이슬 냄새 같은 '진짜 생명력'을 놓치고 만다.
미래의 프로젝트 걱정이 오늘의 소중한 데이트를 망치게 두는 것은 부조리에 굴복하는 삶이다. 아직 오지 않은 불안이라는 그림자가 지금 이 순간의 찬란한 빛을 덮어버리게 해서는 안 된다. 뫼르소의 기이해 보였던 행보들은 사실 이러한 부조리한 침식에 저항하며, 오직 '지금, 여기'의 감각적 진실만을 지켜내려 했던 숭고한 실천이었다.
이 소설이 나에게 묻는 것 같다.
너는 지금 당신의
피부에 닿는 이 공기와
햇살을 온전히 느끼며 살고 있는가?
나에게 주어진 인생은 이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어떤 거대한 절망 앞에서도 현재의 나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삶의 태도라고, 카뮈는 뫼르소의 입을 빌려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달 영업 실적이 반 토막 났다. 석 달 뒤면 살림살이가 좀 빠듯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창밖을 보니 벚나무 꽃봉오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게 여물고 있다. 다음 주에 벚꽃 구경할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들뜬다.
뫼르소라면 아마 창문을 활짝 열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