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최근 AI관련 기술 리더들의 발언을 듣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설레이는 기분이 든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조만간 인류가 '프리 인텔리전스(Free Intelligence)' 시대에 진입할 것이라고 말했고,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한술 더 떠 AI가 일하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시대를 열어 줄 것이니 노후대비를 하지 말라는 파격적인 말까지 했다. 표현의 수위야 어떻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머지않은 미래에 지능은 더 이상 희소한 자원이 아니며, 마치 수도꼭지를 틀면 나오는 물처럼 저렴하고 흔한 공공재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오랜 시간 지능을 인류가 가진 가장 비싼 자산으로 취급해왔다. 복잡한 수식을 풀고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며 남들이 보지 못하는 전략을 짜내는 능력은 사회적 성공의 보증수표였다. 의사, 변호사, 과학자, 경영자라는 직업군이 존경과 부를 동시에 거머쥐었던 이유도 결국 그들이 가진 지능의 희소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수천 배 빠른 속도로 논문을 읽고 코드를 짜며 법률 문서를 검토하는 시대가 오면, 이 모든 전제는 근본부터 흔들릴 것이다.
지능이 무한히 복제되고 배포되는 시대,
나는 이를 '지능의 은퇴'라고 부르고 싶다.
지능이 노동의 현장에서 은퇴한다는 것은 곧 지식 노동으로 먹고살던 직업들은 막을 내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경제학적으로 볼 때 공급이 무한대에 가까워지는 재화의 가치는 결국 0에 수렴한다. 지능이 흔해질수록 지능을 가진 인간의 가치 또한 새로운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 같다.
많은 이들이 AI가 가져올 일자리 상실과 인간의 소외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역사의 궤적을 넓게 펼쳐보면 우리는 이미 비슷한 거대한 전환을 겪은 적이 있다. 18세기 산업 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인류는 지금과 똑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석탄을 태워 얻은 증기 에너지가 인간의 근육을 대신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이제 수 많은 실직자들이 생길 것이라며 절망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했는가. 에너지가 노동력으로 전환되자 생산성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인간은 뙤약볕 아래 쟁기질하는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육체의 은퇴는 오히려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와 새로운 직업의 도출로 성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에너지의 역할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역사적 모먼텀 앞에 서 있는 듯 하다. 화석연료든, 태양광이든, 원자력이든, 인류가 생산하는 에너지는 지금까지 주로 기계를 돌리고 공장을 가동하는 데, 즉 인간의 '물리적 노동'을 대체하는 데 쓰여왔다. 하지만 이제 그 에너지는 거대한 데이터 센터로 흘러들어가 전혀 다른 무언가로 변환되기 시작했다. 바로 '지적 능력'이다. 수백만 개의 서버가 쉬지 않고 전력을 소비하며 만들어내는 것은 더 이상 물건이 아니라, 추론하고 판단하고 창작하는 AI의 사고력이다.
이것이 이번 전환이 갖는 본질적인 의미다.
에너지가 처음으로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산업 혁명이 에너지를 근육으로 변환하는 시대를 열었다면, AI 혁명은 에너지를 지능으로 변환하는 시대를 열고 있다. AI가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신해준다면 인류는 생산 위한 계산과 판단, 지식탐구 작업에서 해방되고, 산업, 교육·의료·행정 서비스 등의 전반적 비용이 획기적으로 낮아지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는 1930년에 쓴 에세이에서 기술 진보 덕분에 미래 세대는 일주일에 단 15시간만 일해도 충분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비록 시기적으로는 빗나갔을지 모르지만, 기술이 노동의 고통을 줄이고 여가를 늘려줄 것이라는 방향성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우리는 그 남는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지점에 와 있다.
지능이 흔해 진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행복해질까. 물질적 결핍이 사라지면 인류는 자동으로 더 나은 존재가 될까. 역사는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지 않는다.
풍요가 찾아왔을 때
인간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감정은
해방감이 아니라 의외로
'권태'였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의 귀족들을 떠올려보자. 노동할 필요도, 싸울 필요도 없었던 그들이 넘쳐나는 시간을 채운 방식은 끝없는 향연과 사치, 그리고 점점 더 강한 자극을 향한 탐닉이었다. 베르사유의 궁정 귀족들도 다르지 않았다. 전쟁도, 생산도 면제된 그들의 일상은 화려했지만 공허했고,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 더 자극적인 오락과 음모와 스캔들에 기댔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곧 삶의 충만함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두 시대는 뚜렷하게 증언한다. 오히려 목표를 잃은 풍요는 인간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독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같은 시대, 같은 풍요 속에서도 전혀 다른 삶을 산 이들이 있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라는 절대적 풍요의 자리에서도 매일 새벽 철학적 사유를 기록하며 자신을 단련했다. 몽테뉴는 귀족의 여유를 향락이 아닌 독서와 사색과 에세이 쓰기로 채웠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메세나의 후원이라는 풍요로운 울타리 안에서도 끝없이 질문하고 탐구하며 자신만의 지적 세계를 구축했다. 이들이 남긴 것은 단순한 업적이 아니었다. 권태를 사유로 전환하는 법을 알았던 자들이 결국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이 지점이 다가올 시대의 새로운 빈부격차가 되지 않을까? 인공지능이 지적 노동마저 대신하는 세상에서 인간이 처음으로 직면하게 될 진짜 적은 가난이 아니라 권태다. 그리고 이 권태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빈부격차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시간을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말초적 자극으로 채우며 하루를 흘려보내는 마치 반려견과 유사한 삶과, 그 시간을 사색과 취미와 지적 유희로 빚어내며 삶의 밀도를 높여가는 삶. 이 두 갈래 사이의 간극이 미래의 새로운 계급을 가를 것이다.
통장 잔고가 아니라,
권태를 대하는 태도가
곧 그 사람의 품격이 되는 시대.
이러한 현상은 니체가 예언한 '마지막 인간(Last Man)'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니체는 창조적인 목표를 잃고 오직 편안함과 작은 쾌락만을 쫓는 인간들이 나타날 것이라 경고했다. 지능이 공짜가 된 시대에 우리가 마주할 진짜 위기는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다. 권태를 직시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 의미를 길어 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는 풍요가 어떻게 고귀한 정신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노동을 면제받은 시민들은 그 빈자리를 말초적 쾌락이 아닌, 신체를 단련하는 경기장과 진리를 탐구하는 광장으로 채웠다.
AI로 지능 노동이 끝나가려는 지금, 우리는 인류사 두 번째 아고라의 입구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이 광장은 지능이 아닌 '지혜'를 겨루는 장이 될 것이며, 어떤 기계의 도움 없이 오직 홀로 인간 고유의 순수함을 증명하는 곳이어야 할 것이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무의미하다"는 소크라테스의 오랜 경고는, 지능의 은퇴가 시작된 오늘날 가장 선명한 실존의 선언문으로 부활하려 한다.
편리함을 얻는 대신 주체성을 팔아넘길 것인가? 아니면 기술을 징검다리 삼아 더 높은 차원의 사유로 도약할 것인가?
지능이 사역에서 은퇴한 어스름한 저녁,
비로소 인간의 지혜라는
별이 순수하게 빛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