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땐 일기를 쓰지 않는다

글까지 쓸 수 있을 만큼 내려갔다

by 고스란

어쩌다 보니 지난 글로부터 4개월이 흘렀다.

일자까지 같은 29일.

누구도 보지 않을 것만 같은 글을 그 사이 여러 명이 읽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민망함이 든다.


근 4개월 참 많은 일이 있었으나 모두 열거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빈 듯 기록되지 않은 시간은 참으로 빨리 흘렀고 그럭저럭 잘 지냈다는 뜻이다.

힘든 순간도 있었고 그때는 다른 것을 생각할 만큼의 여유도 없었을 테지만, 이렇게 앉아 글을 쓴다는 건 바닥을 친 것을 수도 있다.


어떤 내용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정해서 쓰는 것은 아니다.

그냥 글이라도 써야 하기에 쓰는 것이다.

글쓰기의 막막함과 귀찮음을 이길 정도로 내 속에서 넘쳐흐르는 무언가가 있다.

화든 서러움이든 슬픔이든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차올랐다는 뜻이다.

내가 담을 수 없으면 흘러넘치게 둘 수밖에 없고 그렇게 내 의지 넘어 내맡기기엔 일상이란 것이 있으므로 내가 물이 찬 집에서 물을 퍼내듯 두 손으로 덜어내야 하는 것이다.


감사할 수 없는 순간에 감사를 드렸다는 글을 읽으면서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니지만 웃기게도 지금 나 또한 감사한 마음이 든다.

하늘이 보기에 아슬하게 보였거나 탐탁지 않았거나 정신 바짝 차리라고 나를 던져 버렸다.

다행인 건 내동댕이가 쳐져서 살짝 이가 나간 그릇이 되었을 뿐 금이 가거나 완전히 깨진 것은 아니다.

대신 맨드랍게 만져지던 부분에서 움푹 파이고 살짝 벨 듯한 날카로운 흉터가 남았다.


깨지기 전에, 담을 수 있을 때 다시 담으란 뜻이다.

무얼로 채워져 있었는지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

다행히 나는 깨지지 않았고 다시 똑바로 세울 수 있고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

채웠던 것이 없어졌다고 이가 나갔다고 나뒹구는 채로 울고 있을 필요도 시간도 없다.


문질러 닦고 후후 불어 남아 있는 먼지도 날려버린다.

나는 다시 담을 수 있다. 무엇이든.

뭐든 담겼다고 채워지고 있다고 좋아했는데 처음 생각했던 것이 바뀌어 아무거나 꾸역꾸역 그저 채우기만 했는지 모른다.

내가 무엇을 담으려고 했었는지 잊어버린 채.

그냥 채워졌다는 만족감.

나뒹굴어보니 그 안에 있던 것들이 보인다.

다 좋은 것인 줄 알고 꾹꾹 눌러 담았는데 다 쏟아져 보니 담을 계획도 필요도 없던 것들이 뒤섞여 있다.

정작 차곡차곡 담고 싶었던 것들은 별로 없다.

진짜 내 것만 담을 수 있는 것들만 조금 담아본다.

아예 빈 것은 아니다.

다시 시작한다.

이러다 어느 순간에 또 쓸데없는 것들까지 채우며 기만을 떨 때가 올지 모르지만 지금은 원하는 것을 잘 골라서 채우는 기쁨으로 살면 된다.

그 시간은 더디고 지루할 수 있으나 무엇보다 감사하고 행복한 시기란 걸 안다.

그런 시간으로 나이가 또 들어가겠지만 괜찮다.

이번 기회로 나는 조금 더 깊어지고 커질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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