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8**0-5231
오후 12시 34분.
밥을 먹는 중이었다.
밥 먹는 중에는 웬만하면 끊지만 등기우편 때문에 연락이 왔다길래 받았다.
점심시간인데 식사도 못하고 꽤나 바쁘신 거 같아 보였다.
"OO씨 맞으시죠?"
"네."
"등기우편 때문에 연락드렸는데요."
"네."
"내일 본인 앞으로 등기 발송되는데 몇 시에 수령 가능하세요?"
"언제 오시는데요?"
"9시부터 6시까진 다 가능합니다."
"그럼 6시까지 갈게요. 아니 그냥 우체국에 두시면 제가 찾으러 가겠습니다."
"아니요, 이거 자택으로 발송되시는 거고요. 법원 우편물이라 직접 수령하시고 집배원분 가시면 사인도 하나 해주셔야 되시거든요."
"그럼 내일 저녁 6시 가깝게 오시겠어요? 제가 최대한 빨리 맞춰 갈게요."
"네, 6시요."
"근데 어디서 보낸 걸까요?"
"서울 동부 법원 행정처에서 발송되신 거고요. 내일 등기받아서 내용 확인해 보시고 모레 오전 11시까지 신분증 지참하셔서 저희 서울 동부 법원으로 방문해 주시면 되세요."
"법원으로요? 네, 알겠습니다."
"모레 오전 11시예요."
"근데 그걸 내일 주신다고요? 그럼 직장 다니는 사람은 어떻게 처리를 하라고 그렇게 전해주시는 거죠?"
"저도 등기 발송 담당관이라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거든요."
"뭘 알아야 제가 직장에 이유를 말하고 처리를 하러 갈 거 아니겠어요. 내일 퇴근 이후에 받고 수요일에 오전에 오라고 하시면.. 시일이 너무 촉박하잖아요. 혹시 이 문자로 제가 문의해 볼 수 있는 전화번호 하나 우편물에 있다면 사진 찍어 보내주시겠어요? 아니, 봉투 그대로 찍어 주시면 돼요."
"예, 알겠습니다."
"오늘 찍어주실 수 있나요?"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발송되는 등기 우편물 봉투를 제가 볼 수 있게 사진을 찍어 보내주세요. 혹시 지금은 안 되나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문자 하나 남겨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법원등기라니..
입맛이 떨어졌다.
그분도 점심시간까지 일하는 건데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은 거 같아서 약간 죄송하기도 했다.
대충 먹고 올라가 오후 일정을 모두 마쳤다. 아니 하루 일과를 다 보냈다.
궁금해서 검색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그럴 여유는 없었다.
그래, 왜 기분이 더 언짢았는지 기억이 났다.
토요일에 나와 일할 때까지만 해도 되던 컴퓨터가 비번이 먹히지 않아서 오전 내내 로그인도 못했다.
일은커녕 수없이 들어올 메시지조차 확인하지도 못했다.
결국 몇 분은 전화로, 어떤 분은 직접 찾아와서 메신저가 꺼져 있다며 할 일을 말씀해 주셨다.
내가 점심시간에 그 전화를 받는 사이 기사님께서 오셔서 비번을 초기화해 주신 후에나 일을 할 수 있었다.
컴은 정확할 테니 내가 뭘 잘못했나 싶었는데 꼭 내가 잘못해서만은 아닐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기에 그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퇴근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서버에 취합파일을 올려야 하는데 안 되어서 다시 기사님을 기다려야만 했다.
기사님도 꽤나 바쁘셨는지 내 약속을 잊으셨는지 퇴근시간을 훌쩍 넘길 때까지 아무 소식이 없었다.
허투루 날려버린 시간들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도 나를 기다리는 가족의 품으로 가서 먹고 쉴 생각을 하니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강아지 병원에 들러 예약해 둔 약도 찾고 사료도 사고, 맞은편에 있는 감자탕집에서 시래기감자탕 中을 포장했다. 아들과 나, 2명이 먹을 양치고 많지만 우리 둘은 실컷 먹고 차라리 남겨 다음에 먹는 걸 더 좋아한다.
딱 좋을 만큼의 양으로 배를 채운 뒤 바나나와 블루베리를 넣은 플레인 요거트를 후식으로 먹고 일어섰다.
아름다운 가게에 보낼 물건을 싸야 했다.
집 여기저기를 다니며 상자에 채울 물건을 찾아다녔다.
원래는 작아서 못 입는 아들의 옷가지 몇 벌이면 상자를 금방 채울 수 있는데 귀차니즘의 극에 있는 터라 도대체 옷을 내어줄 생각을 안 한다.
2월 말에 신청했다가 다음에 하라고 해서 보름을 미룬 건데 여전하다.
그렇다고 아이의 방에 들어가는 무례를 범하진 않는다. 김붕년 교수님께서 사춘기 아이, 특히 아들의 방에 들어가는 것은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로 전쟁을 하자는 것에 가까우니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가끔 열리는 방을 보면 쓰레기장이 따로 없지만 그래도 그냥 둔다. 평생 그렇게 살진 않을 테니. 비염은 걸리고도 남을 것 같긴 하지만.
다락방에 있는 아주 어렸을 적에 버리지 못하게 해서 처리 못한 장난감들도 넣었다. 이제는 내가 어쩌든 상관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한다.
내 방에서 입을까 말까 고민만 하다 다시 넣어두고 입지 않은 옷도 챙겼다. 남편 방에서 찾으면 금방 채울 것 같았으나 주인이 안 왔으니 건드리지 않는다.
계란 택배상자였던 크기가 같은 네 상자를 겨우 채웠다.
몸 쓰는 일을 다 해서인지 슬슬 머리가 아파 왔다.
도대체 법원 등기는 왜 오는 걸까?
노트북을 켜고 찾아보았다.
- 법원이 발송하는 등기 우편에는 소환장, 판결문, 지급명령 등이 있습니다.
어느 하나도 달가운 것은 없다. 내 재산, 나의 일에서 행정적으로 잘못한 일, 고소받을 만한 게 있었나 생각해 봤다. 딱히 떠오르는 건 없다.
너무도 궁금하여 법원 사이트에 가입해 이것저것 찾아봤다. 도대체 어디서 뭘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것저것 눌러봤으나 속 시원하게 해 줄 것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초록창에 전화가 걸려온 번호를 그대로 쳐 보았다.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헛웃음이 났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낮부터 동동거리며 마음 쓰지 못하게 바쁜 게 왜 이리 감사한지.
오후 11시 35분.
혹시나 싶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 전화는 보이싱피싱으로 의심되어 고객님의 안전을 위해 통화가 종료될 예정입니다."
이제야 완전해졌다.
내일 등기를 열어봤을 때 어떤 내용으로 나를 놀라게 할지, 직장에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일은 어떻게 처리해 놓고 가야 할지 등 그 정도까지만 생각해 놓길 다행이었다.
전화내용을 문자화해서 훑어보았다.
등기가 올 때마다 우체국에 맡겨놓고 찾으러 갔던 경험, 업무에 대한 책임감이 나를 당차게 만들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나서 엄마께 전화드렸다.
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이 번호로 전화 오면 절대 전화받지 마시라고.
법원에서 뭐 왔다고 하면 놀라지도 말고 계속 통화하지도 말고 끊으시라고.
출근을 앞둔 날 새벽 굳이 이렇게 길게 글을 쓰는 이유는..
자칫 나 또한 보이싱피싱에 걸려들 수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아주 생생하게 남겨 놓으리라.
나라고 별 수 없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