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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 Eponine Aug 29. 2021

여름을 위한 영화 31편 08

27일 - 31일: 그 해 여름

서양 영화들에서 '여름'이란 기간은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일이 발생하는 시간으로 사용된다. 그들에게 여름이란 하나의 단계가 끝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 그 도약의 시간이며,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일들을 경험하며 타인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자신을 알아가는 성장의 시간이다. 그 결정적이었던 여름, 그 소중했던 여름의 이야기들을 모아보았다. 누군가는 그 시간을 통하여 죽음을 경험하고, 누군가는 잃어버린 가족을 찾고, 누군가는 모험을 경험하며, 누군가는 삶에 쉼표를 찍고, 누군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그들이 경험한 그 여름을 보며, 나의 이번 여름을 한 번 정리해 보면 어떨까?


마이크롭 앤 가솔린 Microbe et Gasoil, 2015 


감독 미셸 공드리 Michel Gondry

각본 미셸 공드리 Michel Gondry

출연 앙쥬 다르장 Ange Dargent, 테오필 바케 Théophile Baquet, 디안 베스니에 Diane Besnier, 오드리 토투 Audrey Tautou

사춘기 소년 다니엘. 그의 침대 주변은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로 가득하고, 책상 위에는 그가 그린 그림들이 올려져 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몰래 야한 그림을 그리며 자위를 하고, 악몽 때문에 밤 중에 깰 때면 누워서 이리저리 몸을 흔들기도 한다. 또래들보다 덩치가 작아 학교 친구들에게 '미생물'로 불리는 다니엘은, 남자아이들과 어울리기보단 여자 아이들과 어울리고, 심지어 학교 선생님께는 여학생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테오라는 학생이 전학을 오게 된다. 그는 골동품점을 운영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돕고, 심장마비가 두 번이나 왔던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까지 한다. 기계를 만지는 걸 좋아하는 테오의 손에는 늘 기름때가 끼어 있고, 학교 친구들은 그에게서 기름 냄새가 난다고 놀리면서 그를 '가솔린'이라 부른다. 다니엘은 테오가 직접 손 본 그의 자전거를 신기해하고, 두 사람은 어느새 친한 친구가 된다. 테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동네 고물상에 간 두 아이는 잔디 깎기용 엔진을 발견하고, 자신들만의 여름 여행을 꿈꾸며 직접 고카트를 만든다. 그러나 그들은 차량등록을 할 수 없다는 말에 실망하고, 카트를 새로운 형태로 다시 손보기로 한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만의 여행을 시작한다.


학교에서 아웃사이더였던 두 친구는 그 나이 또래 누구나 한 번쯤은 꿈 꾸어봤을 법한 여행을 시작한다. 단 둘이 탄 카트는 차이자 집이 되고, 거기서부터 둘만의 이야기, 어른들이 간섭하지 않는 자신들만의 세상이 열린다. 그 사이 길었던 다니엘의 머리는 짧아지고, 긴 머리로 가려졌던 그의 눈이 드러나며, 키가 훌쩍 자란다. 테오는 그 사이 어머니를 잃고, 형과 아버지를 따라 베르사유를 떠나 그르노블로 이사를 간다. 그 해 여름, 그들의 여행은 끝내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다니엘의 말처럼, 자신들을 그저 작은 존재로 느끼게 했던 커다란 세상이 조금은 줄어든 걸 느꼈을 것이다.  


패어런트 트랩 The Parent Trap, 1998


감독 낸시 메이어스 Nancy Meyers

각본 데이비드 스위프트 David Swift, 낸시 메이어스 Nancy Meyers, 찰스 샤이어 Charles Shyer

출연 린지 로한 Lindsay Lohan, 데니스 퀘이드 Dennis Quaid, 나타샤 리처드슨 Natasha Richardson, 일레인 헨드릭스 Elaine Hendrix, 리사 앤 월터 Lisa Ann Walter, 사이먼 쿤즈 Simon Kunz 

여름 방학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월든 캠프로 모여든 소녀들. 이 수많은 소녀들 중,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의 포도 농장에서 온 할리와 영국 런던에서 온 애니가 있다. 둘은 우연히 펜싱 경기를 하다 서로를 마주하게 되는데, 처음엔 서로의 닮은 모습에 몹시 당황하지만, 이내 외모 이외에는 닮은 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서로를 적대시하게 된다. 두 사람은 두 무리로 갈려 서로에게 장난을 치다 사고를 치게 되고 결국 단 둘이서 멀리 떨어진 숙소에 격리된다. 둘만 남겨진 할리와 애니는 10월 11일이 되면 둘 다 12살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엄마와 아빠의 사진을 확인한다. 그리고 서로가 자매임을, 쌍둥이임을 알게 된다. 아빠를 그리워했던 런던의 애니와 엄마를 그리워했던 나파 밸리의 할리. 두 아이는 그렇게 그리워했던 집으로 돌아간다. 할리는 애니인 척, 애니는 할리인 척.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내 영혼의 단짝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 해 여름, 영국과 미국에 각각 떨어져 살았던 쌍둥이 자매는 서로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어른들이 갈라놓은 두 사람의 세계를 아이들이 나서서 다시 하나가 되게 한다는 것이 꿈같은 일이지만 그 꿈같은 일이 이루어지는 곳이 영화의 세계 아니던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린지 로한의 스크린 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동명의 1961년 영화를 리메이크했다. 원작은 본 적이 없어서 두 영화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보더라도 이 영화에 대한 애정에 변화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 낸시 메이어스의 영화들이 늘 그렇듯, 이 영화도 그녀만의 따스함으로 가득하다. 할리와 애니, 사랑스러운 두 아이가 그동안 그리워했던 한쪽 부모를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볼 때,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오랜만에 우연히 만난 그들의 아빠 닉과 엄마 엘리자베스의 서로를 향한 마음도 보는 사람의 심장을 두근대게 만든다. 찢어졌던 가정이 하나의 행복한 가정으로 다시 태어난 그 해 여름, 그들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닐는지.


마이 걸 My Girl, 1991 


감독 하워드 지프 Howard Zieff

각본 로리스 엘워니 Laurice Elehwany

출연 안나 클럼스키 Anna Chlumsky, 댄 애이크로이드 Dan Aykroyd, 제이미 리 커티스 Jamie Lee Curtis, 맥컬리 컬킨 Macaulay Culkin, 그리핀 듄 Griffin Dunne 

11살 소녀 베이다는 장의사인 아빠, 그리고 할머니와 살고 있다. 장례식장인 그녀의 집은 그녀로 하여금 늘 죽음에 대한 혼란과 염려를 갖게 한다. 그러나 그녀의 아빠 해리는 그녀가 그저 행복하기만 한 11살 소녀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베이다네 장례식장에 한 여자가 찾아온다. 분장사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온 셸리는 이곳이 미용실인 줄 알고 지원을 했지만, 분장의 대상이 시체인 것을 알고도 기꺼이 일을 하겠다고 한다. 한편, 베이다는 짝사랑하고 있던 학교 선생님인 빅슬러가 여름 방학 동안 시 창작 수업을 한다는 것을 알고는 셸리의 캐라반에서 몰래 35달러를 훔쳐 그의 수업에 등록한다. 그리고 해리는 함께 일하는 셸리와 데이트를 시작한다. 


호기심도 많고 예민해서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는 소녀. 늘 죽은 사람을 가까이에서 보아왔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베이다는 그렇게 많은 생각과 의문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장의사인 아빠는 그녀의 행동과 말들을 그저 무심하게 넘길 뿐이다. 그리고 그 해 여름, 그녀의 삶은 작은 변화들을 맞이한다. 무심했던 아빠와 달리 그녀를 관심 있게 바라봐주는 셸리가 등장하고, 짝사랑하는 선생님의 창작 수업을 들으며 시를 쓰고, 특별한 친구 토마스와 추억들을 쌓아간다. 그러나 삶은 긍정의 방향으로만 흐르지는 않는 법. 그녀는 그 해 여름을 통해 뜻하지 않은 것들을 배우게 된다. 새 가족을 맞이하는 법, 사랑이 항상 기쁘지만은 않다는 것, 그리고 현실의 죽음. 아마도 그 해는 '아픔'이라는 것을 처음 새겨 넣은 여름이지 않았을까? 그 해 여름을 보내면서 그렇게 그녀는 성장한다.


태풍이 지나가고 After the Strom, 2016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Hirokazu Koreeda

각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Hirokazu Koreeda

출연 아베 히로시 Hiroshi Abe, 마키 요코 Yôko Maki,  고바야시 사토미 Satomi Kobayashi, 릴리 프랭키 Lily Franky, 키키 키린 Kirin Kiki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 며칠 후, 어머니의 집에 찾아온 료타는 마침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는 집 안 여기저기를 뒤지며 족자를 찾기 시작한다. 족자가 진품이라면 값이 좀 나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아버지의 짐을 다 갖다 버렸다고 한다. 15년 전, '사람 없는 식탁'이란 작품으로 문학상을 받았던 소설가이자 현재는 사립탐정, 아니 흥신소 직원인 료타는 이혼한 아내에게 양육비도 제때 챙겨줄 수 없는 형편이다. 그나마 수중에 들어온 돈은 경륜장에 가서 도박으로 날리기 일쑤고, 소설 취재 차 흥신소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작 글을 쓰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성실하지 못한 아버지를 보며 자라서인지 어렸을 땐 지방공무원이 되고 싶었다던 그는, 아버지처럼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느새 자신이 싫어했던 그 모습을 스스로에게서 발견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늦여름, 24호 태풍이 오던 일요일, 료타는 아들 싱고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싱고가 할머니를 보고 싶어 한다는 핑계로 어머니의 집으로 아이를 데려간다. 싱고의 엄마는 어쩔 수 없이 그 집에 찾아가 함께 저녁을 먹고, 싱고의 할머니는 태풍을 핑계로 세 사람을 하룻밤 동안 집에 머물게 한다.


누구에게나 꿈꾸던 삶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꿈을 이루어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간다. 주인공 료타 또한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를 그토록이나 싫어했고, 그래서 결코 닮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현재의 행복을 놓치고 살았던 아버지의 전철을 밟아가던 그. 그는 이미 이혼한 전처에게 미련을 두고,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는 미래를 도박에 걸며 과거와 미래만을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늦여름, 1명의 행방불명자와 120명의 상해자를 만들어 낸 24호 태풍이 불던 밤, 그는 현재의 자신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그의 삶이 한 번에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그 해 여름, 그날 밤의 기억은 그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순간으로, 자신의 삶을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게 하는 계기로 남았을 것이다.


녹색 광선 Le rayon vert, 1986 


감독 에릭 로메르 Éric Rohmer

각본 에릭 로메르 Éric Rohmer

출연 마리 리비에르 Marie Rivière, 뱅상 고티에 Vincent Gauthier

캐롤린과 여름휴가를 떠나기로 했던 델핀은 2주를 남기고 취소 통보를 받는다. 그녀는 함께 갈 사람을 구하지만, 친구가 소개해 준다는 새로운 남자도, 혼자만의 여행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또 다른 친구는 그녀에게 혼자 여행이나 단체 여행을 제안하며 남자를 만나라지만 여전히 그녀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친구는 그녀가 우울해 보인다며 더 적극적으로 살라고 그녀를 다그친다. 친구와의 설전 중에 그녀는 어떤 일이 일어나길 기다린다며, 녹색을 희망의 색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그녀를 이해하기는커녕 오랫동안 남자가 없어서 그러 거라며 그저 이상하게 바라보는 친구들 사이에서 결국 그녀 울음을 터뜨리고, 그녀는 자신을 위로하는 친구 프랑수아즈를 따라 그녀의 가족들이 있는 고향으로 휴가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다시 파리로 돌아가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무언가 불편했다. 처음에는 델핀이 주변 사람들의 제안에 모조리 부정적으로만 반응을 하는 것이 살짝 불편해지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불편하게 만드는 그녀 주변의 사람들이 더욱 불쾌하게 느껴졌다. 자신들의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타인에 대해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버리는 모습이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했다. 이성과의 만남을 쉽고 편하게 받아들이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델핀은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를 쉽게 만나는 것을 시간 낭비라 생각한다. 친구들은 아무나가 특별한 누군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델핀은 특별한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렇게 친구들과의 차이에서 오는 심리적 갈등을 느끼던 중, 그녀는 그 사람을 만나게 된다. 비아리츠 역에서 눈이 마주쳤던 그 남자. 델핀은 그와 함께 생장드뤼의 바닷가에서, 해가 지며 남겨놓은 녹색빛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델핀이 그날, 8월 4일 금요일, 일기를 썼다면 어떤 글을 남겨놓았을까? 이곳저곳을 헤맸던 7월의 날들을 뒤로하고, 그녀는 아마도 그와 함께 바욘에서 남은 휴가를 즐겼을 것이다. 그 해 여름은 그렇게 그녀에게 큰 위안으로 남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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