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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전 효녀, 후반전 효녀
그리고

이 시대의 K 효녀, 우리 언니를 소개합니다

by Jane C


아빠가 돌아가셨다. 암 진단을 받으신 후 3개월 만에 급작스럽게.

외떨어져 사는 나는 아빠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출발했는데도 결국은 아빠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아빠는 집근처 의료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언니가 마침 밤근무였던 때 그곳으로 응급 입원을 하셨다. 의식이 또렷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상태를 체크하러 나타나는 언니를 볼 때마다 옅은 미소를 짓더라고 엄마는 증언했다.

아빠가 큰 종합 병원에 처음 갔을 때 동행했던 것도 언니였고 1주일간 입원해서 집중 항암 치료를 받을 때 휴가까지 써가면서 내내 그 곳에서 먹고 자고 했던 것도 언니였다. 아빠의 퇴원 후에는 일하는 엄마가 번거로울까 봐 날마다 다른 죽을 사다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해 두었고 돌아가시기 직전 먹고 싶다던 '호박죽'을 마지막으로 떠먹였다. 또 장례식장에서는 음식이 떨어지기도 전에 외부에서 음식을 미리 맞춤 주문하는 노련함으로 조문객들을 넉넉히 맞이한 것은 물론 입맛 없는 식구들의 식사나 간식까지 살뜰히 챙겼다.


언니가 태생부터 효녀였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는 늘 톡톡 쏘아붙이는 성격 탓에 머리가 굵어진 오빠와 심각한 혈투를 벌이기도 했고 삼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인서울 대학을 가지 못해 엄마의 속을 끓였다. 거기에 더해 대학도 가지 않겠다 고집을 부려 내내 첫 딸을 '고졸'로 만들어야 하냐는 푸념을 늘어놓게 했다. 여차저차 전문대를 졸업해 취업을 했는데 1년도 채 안되어 선 임신 후 결혼을 통보하고 과감히 퇴사하는 바람에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으니 언니가 엄마의 자랑이기는 만무했으리라.(나의 사리사욕을 위해 언니의 사생활을 너무 많이 노출시켰다. 이 브런치는 영원히 비밀에 부치기로)


반면 엄마의 자랑은 늘 나였다. 엄마 친구 피셜, 한마디의 잔소리 없이도 새벽까지 공부하는 모범생 딸, 대학 졸업 전 남들에게 자랑해도 손색없을 회사에 떡 하니 입사한 기특한 딸, 결혼할 땐 부모손 하나 빌리지 않고 심지어 부모에게 작은 차 한 대를 떡하니 선물해 주고 간 야무진 딸이 바로 나였다.(내 피셜 아닌 엄마 친구 피셜임을 다시 한번 밝힘...음)

하지만 결혼 후 그 딸은 소리소문 없이 퇴장해 버렸다. 퇴장한 그 딸이 벤치에 앉아 애키우며 지 인생 앞가림하느라 헉헉 대는 동안 엄마의 명치끝 가시 같던 큰 딸이 당당히 등판했다.


아이들을 키워보니 한창 자랄 때는 뭐니 뭐니 해도 공부 잘하는 자식이 효자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영민함이 떨어질수록 따뜻한 눈길 하나 더 보태 주는 자식에 맘이 가는 건 인지상정이다. 어렸을 땐 영특해 효도하고 다 커서는 살뜰해 효도하는 그런 '올라운드 플레이어' 자식은? 유니콘이다!


친구와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자식은 두 가지 부류가 있어. 나처럼 어릴 때 공부로 효도한 전반전 효자와 공부 대신 다 커서 진짜 봉양하는 우리 언니 같은 후반전 효자. 그러니 지금 공부 못하던 자식이 나중 후반전 효자가 될지 어찌 알아?"

"아니 아니, 근데... 그거 말고 딴 거 또 있어.

...불효자..."


솔직히 우리 애들이 전반전엔 많이 쉬고 있어 후반전에라도 열심히 뛰어주기를 살짝 기대하면서 한 말이었는데, 앗뿔싸! '우천 취소'라는 변수가 있었다니!! 하긴 효자고 불효자고 부모뜻대로 되는 자식이 세상 어디 있던가. 하여 잠시 어리석었던 나를 탓하며 겸허히 기도한다. 다만 '우천 취소'에도 절대 섭섭하지 않을 관대한 마음과 흠뻑 내리는 비에도 감기 걸리지 않을 강철 같은 체력을 갖게 해달라고.




엄마에게서 보이스톡이 왔다. 약 3분 정도 안부 대화 후 본론이 등장한다.

"언니가 얘기도 없이 인터넷으로 꽃을 보냈잖아~~ 보낸 사람도 안 적혀 있어 몰랐는데 이런 짓 할 사람이 언니 밖에 더 있어. 꽃이 어찌나 풍성하게 많이 왔던지 꽃병 1개는 한참 모자라."

긴 통화 후 온 바로 온 카톡에서는 화사한 유채꽃밭에서 K하트를 하고 있는 엄마 사진이 있다. 언니가 준 구찌 가방을 당당히 앞으로 메고.

<카톡 대화>

'울 엄마 꽃처럼 곱네ㅎㅎㅎ언니가 그 가방 안 줬으면 큰일 날 뻔~'

'안 그래도 언니가 얼마 전에 프라다 가방 새로 사줬는데 왜 그거 안 들었냐고 뭐라 하더라'

'울 엄마 호강 많이 하네ㅎㅎ'

'자식 잘 낳은 덕분이지 ㅋㅋ'



요즘 엄마의 자랑은 단연 언니다. 삼겹살 대신 기어이 투뿔 한우를 먹이는 딸도, 아빠의 부재로 우울할 엄마를 위해 꽃배송을 시키고 신상 수분 크림과 계절별 새 옷을 사다 나르는 딸도 모두 우리 언니다. 이런 언니를 '후반전 효녀'라 칭하는 것은 어쩌면 전반전이라도 뛰었다 생색내고픈 나의 교만일지 모르겠다. 어쩌면 엄마의 마음속에 언니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풀타임 올라운드 플레이어' 였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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