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성들 : 문학동네 2022 겨울호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하고 우리를 지탱하는 관계와 돌봄들에 관하여
친밀함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관계는 아무래도 '가족'이 아닐까. 가족이 친밀해서라기보다는 가족은 친밀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 반대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그 개인 내부의 문제로 치부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정말 가족은 친밀한가? 당신은 가족들과 친밀한가요? 가족은 친밀해야 하나요?
요즘은 '정상 가족'에 대한 질문도 많이 한다. 아들 딸을 둔 4인 가족을 '정상 가족'이라고 부르는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교과서를 관통해서 아이들의 교육 속에 녹아 있는 시대에 살지만, 우리가 실제로 접하는 뉴스에서 '1인 가구가 늘고 있다'는 이야기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결혼도 출산도 선택인 시대에 가족의 정상성을 4인 가족에 맞추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여둘톡의 김하나, 황선우의 동거 라이프를 동경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의외로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보다 말이 잘 통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 공간의 확보'였다. 거기가 어디든 누구와 살든 예민한 나는 나의 경계를 갖기를 원한다. 그 경계가 아주 두껍고 무거운 벽은 아니지만, 내 것도 내 것 네 것도 내 것이 되어버리는 상황을 마주하는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쏟게 될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결혼이 아닌 동거로운 생활을 선택한다. 그 선택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나는 그 바닥에 '보호받지 못하는 개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자신의 보호망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연대를 만들려는 시도는 아름답기도 처절하기도 하다.
사실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은 지긋지긋하다. '우리 가족은 행복해요'라는 말보다 차라리 '어느 집에나 망나니는 있다'는 말을 더 믿는 편이고, 가족이 만들어가는 공동체의 시간은 깨끗하지도 단정하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것을 견디며 살아간다. 그런 위생적 공동체는 존재하지도 않지만, 그런 공동체가 과연 공동체로서 어떤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생크림 케이크처럼 예쁘고 달콤한 관계 앞에 냄새나는 육체와 빚보증 채무 같은 질퍽한 것들을 갖다 놓으면 그 관계는 과연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 고통스러운 것들을 감수하는 것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징그럽게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김영민 교수는 '우정의 종말'에서 우정은 덕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관계라고 했다. 우정이라는 말이 주는 산뜻하고 수수한 느낌이 새로웠다. 결혼은 사랑으로 하고, 싸움은 의리로 하는 것인데 우정은 어디다 쓰는 것일까. 우정을 노나 갖는 경험은 나이가 들수록 힘들다. 게다가 지금은 우정이 깃들기 어려운 시대이기도 하다. 우정을 말하기 전에 경쟁하는 마음과 저울질의 속도가 더 빠르다. 그것들은 어쩌면 그렇게 우정의 'ㅇ'을 말하기도 전에 이미 사람을 귀신같이 스캔하는지 신기하다. 하지만 한 발 물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결국 '우정'을 나눠가진 사람들이다. 내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해도 내가 싫어하는 게 뭔지는 알아주는 사람은 마음이 놓인다. 선을 넘지 않는 격을 가진 사람에게 우리는 최선을 다할 수 있다.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 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야기가 끝나면 새로워진 나를 인식하게 하는 사람, 그 사람과 내가 나눈 것이 바로 우정이다.
그간 우리가 마음에 품었던 친밀함에 대한 스펙트럼을 넓힌다. 좋고 싫음의 이분법이 아니라 친밀함의 다양한 모양을 살피고, 관계마다 가지고 있는 깊이와 즐거움을 성실하게 찾을 때 조금 더 친밀해질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니 우정이니 하는 것들도 결국은 성실해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