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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육아'대신 '자아실현'을 한 친정엄마를 응원한다.

작가 김영홍을 응원합니다.

'황혼육아' 대신 '자아실현'을 한 친정엄마를 응원한다.

(작가 김영홍을 응원합니다.)


● 날짜 : 2019.11.12(화)

● 날씨 : 쌀쌀하지만 공기 깨끗

● 제목 : '황혼육아' 대신 '자아실현'을 한 친정엄마를 응원한다.


사진출처 : 뉴스핌 (2019.8.30 대한민국 독서대전 개막식) 도종완 시인 옆 한복 입으신 분이 친정엄마

내가 결혼 후 친정과 멀리 떨어진 타지로 이동하게 되었을 때, 낯선 타지에서 맞벌이 부부가 친인척 도움 전~혀 없이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 이렇게 고단하고 힘겨운...(때론 정말 사투..ㅠ.ㅠ)일인지 전혀~~~~~~ 상상조차 못 했다.


그러다 워니를 낳고 1년 육아 휴직했을 때 만해도 사실 내가 아이를 줄곧 데리고 있으니 복직 후 나에게 어떤 시련들이 닥쳐올지 몰랐다.


 14개월부터 워니가 어린이집에 가고 내가 워니 15개월 차 복직했을 때 친정부모님이 아이 어린이집 적응을 위해 두 달여간 우리 집에 와 계셨다. 사실 내가 복직 전부터 친정엄마는 나에게 "내가 키워줘야 하는데...." , "작은 외숙모네 데려다 놓고 주말에 데리러 올래? 작은 외숙모가 아이들을 많이 키워봐서 애들도 잘 보고 아직 젊고, 외삼촌도 공무원이라 너 일하는 것도 이해도 하고..." 이런 말들을 내가 묻지도 않는데 먼저 꺼내시곤 했다. 아무래도 친정 엄마도 일하는 딸을 둔 입장에서 외손주를 양육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심적 부담을 먼저 갖고 계셨던 듯하다. 그런데 사실 난 어린이집에 보내고 내가 퇴근 후 데리고 오면 되는데 왜 굳이 2시간 여가 넘는 외숙모 댁에 워니를 맡기냐고... 엄마를 나무랐다.  


그러다 워니가 어린이집에 잘 다니다가도 열이 오르고 아플 때면 친정부모님께 SOS를 했고, 그렇게 워니가 돌 지나서 어린이집에 갈 때부터 6살 돼서 쭈니를 낳을 때까지 근 3~4년간 친정부모님이 1년에 3개월은 꼴은 우리 집에 와계시곤 했다. 워니가 아플 때 도움받고 겨울에 눈 많이 와서 내가 운전해서 출퇴근하는 게 걱정되시니 대중교통 이용해서 출퇴근하라고 한두 달씩와 계시곤 했다.


이래저래 다 합해보면 4년 동안 꼬박 12개월은 워니를 양육해주신 듯하다.


물론, 가까이서 등 하원 다 챙겨주시고, 도맡아 키워주신 건 아니더라도 그 3~4년 사이 부모님이 급할 때마다 워니를 케어해주셔서 난 나름 전입 온 직원 치고는 주요 부서 일 잘하는 일꾼들만 모인다는  자리로 빨리 이동했고, 전입자임에도 불구하고 승진도 순탄하게 했다.  그런데 쭈니를 낳고 3년 내리 휴직을 낸 나를 두고 엄마의 남동생인 앞서 말한 공무원 선배인 외삼촌이 엄마에게 "누나, 똑똑하고 능력 있는 딸 출세하게 누나가 애들을 키워줘야지. 저렇게 똑똑한 애를 왜 집에 눌러 앉쳐놔."라고 말했다면서 엄마가 내심 나에게 미안한 듯 말을 꺼내셨다. 


그게 벌써 4년 전 일이다. 2015년 그해 친정엄마는 일흔이 넘은 나이셨는데, 엄마가 거주하는 지자체 보조금 사업 중 하나인 '1인 1 책 펴내기'에 꿈을 안고 동주민자치센터 글쓰기 교실에 다니는데 한참~ 재미를 붙이셨고.... 엄마의 원고가 심사에서 통과돼서 시 보조금을 지원받아 생애 첫 수필집을 펴내셨다. 


엄마의 그런 결실을 곁에서 지켜본 나는 그게 얼마나 오래된 꿈인지 알고 있었다. 내가 공무원 시험 준비할 때 엄마랑 동네 뒷동산을 산책하는데 엄마가 "딸~~ 엄마는 꿈이 하나 있는데, 엄마 아는 언니가 글쓰기 교실 다녀서 책을 냈거든, 엄마도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 싶어."라고 말하고 10년 만에 이룬 꿈이었다.(친정 엄마는 먹고살기 바빠서 책 한 줄 읽을 새 없이 살아오셨는데,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한 게 농협이나 축협 이런 금융기관들에 공짜로 주는 가계부에 매일 콩나물 300원, 두부 500원 이렇게  돈 쓴 걸 기록하면서... 매일 날짜 밑에 있는 작은 여백에 한두 문장씩~이라도 '오늘은 처리가 말썽을 좀 피웠지만 크는 과정이려니' 한다. 이런 식으로 기록을 매일 하셨다. )


우리 엄마는 가난한 집 7남매에 맏딸이다.(원래는 부자셨다는데 이상하게 옛날에 가장이 전답을 다 팔아서 집이 망한 뻔한 스토리가 엄마네  이야기였다 ~ 후훗~ 그래서 외할머니가 일 다니고 엄마가 동생들을 엎어 키우고 밥도 해줘야 했단다.... 초등학교도 다니다 말다 가는 날도 있고 못 가는 날도 있고.... 겨우 한글만 떼시고 졸업장은 못 받으셨다는 울 엄마)  그런 엄마의 글이니 엄마가 나에게 퇴고를 맡겼을 때 맞춤법이 엉망이었다. 그래도 참~ 신기한 게 일흔이 넘은 나이에 독수리 타법으로 막내아들이 쓰던 노트북 준걸로 그렇게 많은 원고를 써내신 게... 내가 자식이고 엄마가 엄마인데 참~ 신통했다~^^


그래서 엄마가 외삼촌 이야기를 전하며 나에게 "너 출세하게 내가 애 봐줘야 하는데..." 라며 말을 얼버무리실 때 난 단박에 "엄마! 걱정 마! 엄마가 애들 키워줘도 나 출세 못해 ㅋㅋㅋ 그리고 엄마 난 정년까지 꾸준하게 무탈하게 내가 공직생활 마치면 그걸로 내가 엄청 잘 살았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내 인생의 목적은 '내가 만들어 세상에 내어놓은 아이들.. 내 가족과 행복' 한 거고, 직장은 그 행복을 위한 '수단' 이야."라고 말했다.


엄마가 나에게 미안해하심을 덜어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실제 내 철학이기도 하다. 이때까지도 우린 세상 둘도 없이 사이좋은 모녀였고

엄마는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이야기 못하는 속 이야기나 비밀 이야기도 나에겐 다 털어놓으셨다. 나를 그만큼 믿으셨고, 나를 그만큼 말귀 알아듣는 자식으로 여기셨다.


그랬던 우리 모녀에게 담이 생겨버렸다.


발단은 내가 3년 휴직 후 복직했을 때  딱 2년 전 이맘때 일이다. 쭈니 하원 때문에 도우미 이모의 도움을 두어 달 받았는데 돌연 못하겠다 했고 나는 나대로 복직해서 업무 적응하느라 힘든 데다가, 업무도 폭주할 때여서 다급한 마음에 친정 엄마에게 밤늦은 시간 겨울 방학 때와서 아이들 봐주기로 한 거 2주 앞당겨 와 주시면 안 되냐고 했던 전화가 화근이었다.


여기에 글로 풀자면 한이 없고~~ 따로 내 일기장에 그때의 심정을 적은 글을 다시 봐도 서러울 만큼 매정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난 참~~ 잊지를 못하는 게... 일기장에 기록을 너무 생생하게 해 둔다.)

나는 전화를 끊고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서럽게 밤새 울었고 남편에게 "나 이제 친정 없어. 애들 아프든 애들 키우며 우리 맞벌이하면서 힘들 때 이젠 당신과 나 우리 둘 뿐이니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해. 어디 기대 곳 없다는 생각으로 당신도 이제 나 몰라라 하지 말고 육아. 가사 모두가 내 몫이고, 당신 몫이고, 우리 몫이라는 생각 단단히 해"라고 친정 부모님께 느낀 서운함을 남편에게 퍼붓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하루가 멀다 하고 통화하던 우리 모녀는 명절 전후로만 간간히 통화하고, 명절에도 이제 친정에서 자고 오는 일은 없어졌다.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고 부모 자식 인연이 끊어지는 건 아니니 늘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고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지만 예전같이 살가운 표현들이 우리 사이에서 사라졌다. 


그 2년을 지나는 동안 사실. 내가 엄청 강인해졌음을 느낀다. 비로소 부모로부터 진정으로 독립된 내가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이번에 워니의 입원 때 남편도 나도 아주 곤욕스러웠다. 그리고 폐렴이 늑막염까지 진행되었다고 할 때는 정말 누구라도 붙잡고  엉엉~~ 울고도 싶었다. 그때 친정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에게 들었는데, 워니 입원했다며?" 나는 아주 냉정하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엄마 아빠 건강 챙기시고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세요."라고 끊었다. 전화를  더 붙잡고 있으면 울음이 터질지도 몰라서였다.


하지만 난 정말 난 한순간도 눈물 보이지 않으려, 담담히 남편과 스케줄을 조율하고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지인을 통해 간병 이모님을 구하 했다. 남편 회사에서도 내 주변에서도 아이가 아파서 간병 이모님을 구한다는 말을 하면 한결같이 "할머니나 외할머니나 누구 도와주실 어르신  안 계셔?"라고들 했다. 쭈니 유치원에서도 "양가에 누구 와주실 수 있는 할머님들 안 계세요?"라고 했다.


그 물음들을 2년 전에 들었더라면 난 서글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단해지는 나는 "양가 부모님 다 계세요. 그런데 연로하셔서 저희가 가서 간병해야 할 연세들이세요." 라며 조부모님의 육아 구원투수로써 역할에 대해 일축했다.


워니의 퇴원 일주일 후 내가 열이 39도를 넘으며 병이 나고, 쭈니가 연이어 아파서 등원을 못하게 됐을 때도 육아 돌보미 서비를 신청하며 쭈니에게 " 엄마, 아빠는 회사에 가야 해서 쭈니가 유치원 못 가게 되면 엄마가 도와주실 이모님을 부르는 거야. 쭈니가 낯가림이 심해서 처음엔 힘들겠지만 쭈니가 부탁하면 쭈니 도와주시는 이모님이시니 엄마가 회사에서 올 동안 이모님이랑 잘 지내야 해."라고 틈틈이 이야기를 해줬다. 그럴 때마다 쭈니는 울상이 됐지만, 돌보미 이모가 오면 출근하는 엄마에게 엉엉 울면서도 손을 흔들며 받아들였다. 하아~~~ 

돌아보면 아이들에게 참~~~ 미안할지도 모르겠지만, 성인이 되었을 때 이 글을 본다면 워니랑 쭈니가 엄마의 지금의 심정들을 이해해줄 거라 믿는다.


복직 후 내가 도움을 청했을 때 완곡한 거절이 아닌 (아파서 힘들다 하면서 거절하셨더라면 정말 내가 너무 미안했을 텐데...) 정말 가시처럼 꽂힌 친정부모님의 말들에 아주 큰 상처가 되었다. 하지만 2년여간 돌이켜보니 난 아주 생존력 강한 워킹맘으로 단단해졌고, 일흔을 훌쩍 넘긴 친정 엄마는 그 사이 두 권의 수필집, 한 권의 시집을 펴내고 올봄 시인으로 등단하고, 올 가을 대한민국 독서대전 개막식에 도종완 시인과 엄마 수필집 속 이야기를 낭송하며 메인 무대에 주인공으로 오르셨다.(각종 공모전 당선은 또 얼마나 많이 되셨는지 가족 카톡방엔 우리 4남매가 학교 다닐 때 받았던 상보다 엄마의 수상 소식이 더 많이 올라오는 듯하다~~ 후훗~^^)


그리고 아래 링크처럼 엄마 이름 석자를 검색창에 치니 주르륵~~ 아래 링크처럼 뉴스 기사에 엄마 이름이 나오는 "그야말로 세상에 이름을 내는 출세한 작가님이 되셨다." 후훗~ 


얼마 전 한 TV프로에서 "황혼육아"로 우울증에 걸리고 삶이 피폐해진 조부모들 이야기가 나오는 걸 봤다. 그 걸 보면서 어쩌면 우리 엄마가 2년 전 11월 딱 이맘때 나에게 그때 모질게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친정엄마도 저렇게 "황혼육아"로 피폐해졌으면서도 자식에게 말 한마디 못 하고 가슴앓이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황혼육아" 대신 "자아실현"을 하고 있는 엄마의 노년이 감사하다.

누구누구의 엄마, 누구누구의 할머니가 아닌

작가 김영홍으로 살아가고 있는 친정 엄마를 응원한다.






할아버지 꽃상여


         김영홍


할아버지 저 세상 가시는 날

사지 꼭꼭 묶여 오동나무 늘 속

꽃상여에 실려 떠나가신다


마지막 발인제 마지막 막걸리 잔에

자식들 통곡 소리 산천이 떠나가고

꽃상여 하늘나라로 승천하신다


육 남매 상주 뒤 따르고

만장 행렬 산모퉁이 휘감고 돌아

이승의 서러운 고개 넘어 가시는

고인의 눈물 따라 줄지어 간다


꽃상여 위의 요량 잡이 회심곡回心曲

가락과 핑경 소리 구슬프다


"어허어허, 댕그렁댕그렁"


"북망산천이 머다더니 내 집 앞이 북 망일 세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이나 일러주오"


소리꾼 메기는 소리에 상여를 메고 있는

상여꾼들이 받는다


"자라 자라 에헤 에헤 에에 너화 넘자 너화 너"


구성진 가락에 따르는 자손들 조문객들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할아버지 영혼을 달래는 요량 소리가

내 폐부를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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