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는 여전히 나를 뒤흔든다

2010년 나의 첫 번째 유럽 여행 이야기 #3 피렌체

by hama


처음 피렌체에 대해 알게 된 건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를 통해서이다. 연인 사이의 애틋함을 이해하기에 너무 어렸던 나는 대신 소설의 배경인 피렌체에 빠지게 되었다. 빽빽한 적갈색 지붕 사이를 비추는 햇살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두오모가 있는 피렌체. 나를 사로잡았던 그 문장은 지금 읽어도 울렁거린다. 불같은 옛사랑의 추억 같은 건 없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지만 피렌체를 향하는 기차 안에선 헤어진 연인과 재회하러 가는 것처럼 설레기 시작했다.



밀라노에서 3시간 정도 떨어진 피렌체는 밀라노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붉은 지붕의 상아색 건물들 사이로 부서지는 햇빛들이 피렌체의 따스함을 만들어냈다. 그래서인지 피렌체 사람들도 유독 유쾌하고 정이 많았다. 밀라노가 세련된 에스프레소라면 피렌체는 부드러운 카푸치노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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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를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도시 자체가 살아있는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상징인 두오모를 시작으로 르네상스 예술의 꽃 우피치 미술관, 베키오 다리,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미켈란젤로 광장, 산 로렌초 성당 등 발이 닿는 곳곳마다 피렌체의 유구한 역사와 마주할 수 있다. 심지어 예술적이기까지 했다. 모든 게 신기한 거 투성이었던지라 평범해 보이는 골목을 걸을 때도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처럼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게 되고 식당에서 주는 포크와 스푼마저도 뭔가 달라 보여 사진으로 남기기 바빴다.



이 아름다운 도시 피렌체에서 무조건 해야 하는 일 한 가지만 꼽자면, 전망대에 올라 피렌체 시내를 보는 것이다. 피렌체 시내를 한눈에 보기 위해서는 두오모 쿠폴라(돔)에 오르거나 조토의 종탑(Campanile di Giotto)에 오르면 되는데 두오모의 쿠폴라가 바로 <냉정과 열정 사이>의 준세이와 아오이가 재회하는 곳이다.



두오모의 천장


우선 돔에 가기 위해선 400개가 넘는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살면서 400 여개의 계단을 한 번에 올라본 적이 없어서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차라리 몰라서 다행이었다. 어린 나이를 무기 삼아 자신만만하게 1등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중반을 지나니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얼마나 남았는지 알면 오르는 게 더 힘들어질 것 같아 말도 안 하고 무념무상, 그저 앞에 있는 계단만 바라보고 걸었다. '왜 이 꼭대기에 오른다고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며 나의 결정을 후회할 때쯤 돔에 다다랐다.




돔에서 피렌체를 내려다보면 계단을 오르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중력을 거슬러 올라갔을 뿐인데 이런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니. "평생을 땅에 발 붙이고 사니 이렇게라도 자유를 느껴봐라"라고 말하는 신의 배려 같다. 그 정도로 황홀한 경험이자 길지 않은 18년 인생 중 최고의 순간이었다. 작은 것 하나 놓칠까 조마조마하게 돌아다녔던 피렌체가 내 손 끝에 닿고 내 발아래에 있었다. 가게의 간판, 식당에서 주는 냅킨, 돌길의 튀어나온 돌이 아닌 얕은 산 옆으로 발그스름한 지붕을 가진 피렌체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때서야 피렌체를 제대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조심스럽고 숨 가쁘게 다녔던 날들이 조금은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 피렌체를 바라보다 유독 눈에 들어오는 집이 있으면 '저기엔 어떤 사람이 살까?', '저기에 분명 잘 사는 사람들이 살 거야 언니.', '나중에 우리도 저런 집 하나 사서 가족들 초대하면서 살자.'며 동생과 시답잖은 얘기를 나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함과 기대가 공존했던 시기에 할 수 있었던 무모하고 즐거운 상상들 얼마나 나를 흥분시키던지. 가끔은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던 그 시절의 내가 부럽다.



피렌체에 다녀온 지 십 년 훌쩍 지났지만 집을 사기는커녕 피렌체에 다시 가보는 것도 어려워졌다. 하지만 이따금씩 피렌체에서 느낀 설렘이 튀어나와 평범한 일상에 파동을 만든다. 피렌체에 다시 가게 된다면 어떨까? 그때보다 무거워진 몸 때문에 두오모 오르는 게 더 힘들어질 수도 있겠다. 우피치 미술관은 또다시 나의 모든 감각을 일깨우고 쓰게만 느껴졌던 에스프레소의 매력을 조금은 알게 될 수도. 피렌체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인데 나만 변한 것 같아 괜스레 슬퍼지기도 할 것 같다. 방금 했던 말과 달리 나는 여전히 내가 만든 상상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상상들은 나를 흔들어 놓는다. 그렇게 나는 피렌체에 흔들린 채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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