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사촌 언니와 조카가 영국으로 돌아갔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결혼하자마자 사촌 언니와 형부는 영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출산을 했고 코로나 때문에 출산 후 아이와 외출 한번 못하던 언니는 작년 8월 겸사겸사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영상 통화로만 보던 조카를 드디어 만난다니. 마치 티브이에서만 보던 연예인을 만나는 것처럼 실감이 나질 않았다.
아기는 화면에서 봤을 때 보다 훨씬 작고 따듯하고 유약했다. 만지면 깨질 것 같아 처음엔 안아보는 것도 겁이 났다. 안을 때 목은 어떻게 감싸줘야 하고 밥은 얼마나 자주 줘야 하는지, 몇 시간마다 깨는지, 물 온도는 몇 도가 적당한지 아는 게 하나도 없는 0점짜리 이모였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땐 목만 겨우 가눌 수 있었는데 이제는 엄청난 속도로 기어 다니고 보이는 건 다 잡고 일어나려 하고 자기 만의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처음엔 나를 어색해했지만 이젠 나에게 팔을 뻗어 내 품에 안긴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누구보다 빨리 문 앞으로 기어와 나를 맞아준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조카를 보면서 그동안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난 항상 내가 우선이었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하는 관계를 지양했다는 것이다. 모두가 동등하고 서로 존중하는 관계를 원했기 때문에 난 내가 받은 만큼 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고 또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타인과의 관계로 인해 스스로를 갉아먹거나 상처받길 원치 않았다. 혹여 누군가는 계산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한 '바람직한 관계'란 이런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절대적인 사랑, 즉 아가페적 사랑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아무 대가 없이 사랑하는 게 가능할까? 물론 부모님도 나에게 넘치는 사랑을 주셨지만, 그런 부모님을 보면서도 내가 아이를 낳아도 저렇게까지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불투명한 미래의 아이보다 난 현재의 내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카를 만나면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단순히 가족이라 느낄 수 있는 유대감을 뛰어넘는, 말로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고 어떻게 해서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나를 향해 꼬물거리는 조카의 손짓에 너무나 행복했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볼 때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뭐든 아이를 위해 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절대적인 사랑이 이런 거구나. 나에게 무언가를 주지 않아도 나는 조카 자체를 사랑한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안고 있어도 더 꽉 안고 싶었다. 받은 게 없어도 그보다 더 큰 사랑을 주는 행복을 조카 덕분에 알게 되었다.
꽤 긴 시간을 함께 보내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조카를 보내는 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힘들었다. 집에 가면 나를 향해 환히 웃던 조카가 있을 것만 같아서 더 이상 집에 가는 시간이 기다려지지 않는다. 집 안 곳곳에 남아있는 아기의 흔적을 마주할 때마다 울컥하게 된다. 아주 긴 세월을 산 건 아니지만 만남과 헤어짐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헤어짐은 아쉽고 어렵다. 언젠간 헤어짐에 무뎌질 수 있을까? 떠나는 조카를 보며 다음에는 더 씩씩해져서 만나자!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이모가 될 수 있을까? 아마 한동안은 어려울 것 같다. 더 많이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줄 걸. 후회만 쌓이는 무거운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