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됐습니다. 그래서요?
달라진 건 마들렌 반죽 뿐
2013년 1월 1일
스물. 나는 가족들과 함께 TV로 타종행사를 보며 국가가 인정하는 성인이 됐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K-POP을 좋아했기 때문에 연말 가요무대를 보면서 애 티를 벗지 못한 얼굴로 동생과 아웅다웅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그나마 기억나는 건 성인이 되었다고 축하해주시던 부모님의 얼굴뿐. 그때의 감정이 어땠는지 그때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초-중-고 모두가 겪는 그 길의 끝과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시작 앞에서 두렵기보단 흥미진진해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2023년 1월 1일
딱 10년 후, 서른. 그날의 나는 타종 소리는 커녕 티비도 틀지 않은 채 새해를 맞이했다. 일부러 듣지 않았던 건 아니다. 새로 사귄 독서모임 친구들과 급하게 만나 나름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고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쓸쓸함이 문뜩 느껴져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화근이었다. 분명 가요대제전을 보면서 새해 종소리를 들어야지 했는데 어쩌다가 보니 밀가루로 엉망된 주방에서 마들렌을 만들고 있었다. 유튜브로 본 레시피에선 반죽 휴지에 한 시간이나 걸린다 했다. 실수로 쏟은 박력분으로 싱크대가 어질러진 채로 겨우 반죽을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두곤, 휴대폰을 보니 마침 딱 11시. 올해 만든 반죽으로 내년에 굽는 마들렌이 되겠네 라는 생각에 혼자 낄낄거리며 소파에 누웠다.
내가 구운 마들렌, 너를 위해 구웠지!카톡을 켜니 친구들이 '올해 첫 곡으로 뭘 들을 거냐'는 이야기부터 해왔다. 몇 년 전부터 그해 처음 들은 노래가 한 해를 좌우한다며 첫곡 선정에 심혈을 기울이는 트렌드가 생겼다. 난 지난해에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싶어 방탄소년단의 'Answer : Love Myself'를 들었고, 지지난해에는 취업의 희망을 담아 우주소녀의 '이루리'를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진짜 그 노래를 따라 한 해가 간 듯 싶기도 하긴 하다. 무튼, 올해에는 데이식스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와 원필의 '행운을 빌어줘' 중 고민하다 전자를 골랐다. 서른이라고 하니 뭔가 거창한 느낌에 며칠 전부터 뭔가 싱숭생숭했기 때문이다. 서른이 된다고 해서 뭔가가 드라마틱하게 바뀔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기다리게 된 지금 이 순간이 추억할만했던 날들로 기억되길 바랐을 뿐이다.
인터넷에선 3년 만에 타종행사가 열려 난리였다. 지난해 월드컵에서 화제가 됐던 축구선수 조규성과 '우리들의 블루스'에 나온 정은혜 작가 등등이 제야의 종을 함께 쳤다고 했다. 물론 나의 1월 1일은 종소리 대신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와 마들렌 반죽 휴지가 완료됐다는 알람벨소리로 시작했지만. 노래를 들으며 친구들에게 우다다 '해피뉴이어' 문자를 보내곤 마들렌 만들기에 집중했다.
뭐 그렇게 시답지 않은 몇 분을 거쳐 서른이 됐다. 사실 달라진 건 반죽이 구워져서 마들렌이 됐다는 것 밖에 없다. 10분 만에 달라질 수 있는 건 반죽 정도지 사람이 그렇게 달라질 리가. 그냥 그렇게 서른이 됐다. 그날 구운 마들렌을 주변인들에게 나눠주고 새해 첫 소비로 '어린왕자'를 구매하고 적당히 낮잠을 자며 하루를 보냈다. 밤에는 더 이상 어린 왕자로 살지 못할 수도 있다 생각하며 아쉬워하곤 서른 살의 첫날이 끝났다. 똑같은 하루였다.
서른이 되면 뭐라도 될 줄 알았던 어린 날의 내가 웃기고, 서른이 되면 큰일이 날 줄 알았던 20대 후반의 내가 안타깝다. 서른이 된 지 이틀이 된 나의 찐후기는 '그래서요?' 아직 30대가 9년 하고도 364일가량이 남아있는데 하루 만에 뭐가 바뀌겠나. 그냥 새해가 된 게 조금 덜 기쁜 어른이 됐을 뿐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쩌라고요?'라는 느낌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둔다. 내가 말한 '그래서요?'는 책의 후반부를 궁금해하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호기심 같은 느낌이다. 그래 서른이 이제 됐다. 그래서요? 이 뒤는 또 미래의 내가 채워가겠지.
두려웠건, 기대됐건 서른은 왔다. 만 나이가 도입되면 금방 또 뺏겨버릴 서른이지만 내가 선택한 노래처럼 내 첫 서른은 내 청춘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모두 해피뉴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