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옥미 Jun 08. 2021

사람에 대한 예의

사람에 대해 얼마나 예의를 지키고 있습니까?




곱씹으며 문장에 집중하고 의미를 찾아보고 나에게 적용하며 읽었던 책이다. 사람은 어디에 사는지, 어떤 시대에 살게 되는지, 어떤 환경에 노출되느냐에 따라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에 순응하며 살게 된다. 그것의 결과로 일어나는 일을 당연하고 익숙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진짜 정의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만약 일제강점기 때 살았다면 친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굶주림이 반복된 저 멀리 오지의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다면 먹을 것을 보고 도적질을 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진리이고 정의라고 여기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도 정당하게 여겼던 중세의 종교적 폭력 앞에 그것은 옳지 않다고 외칠 수 있었을까?


p14 비극은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믿는 데서 출발한다. 내가 만약 노예제 사회에서 태어났다면 노예로도, 주인으로도 ‘잘’ 살았을 것이다. 지주 밑에서 마름 역할도 유능하게 했을지 모른다. ‘소작농에게 나만큼 잘해주는 마음은 없을 것’이라고 자부하면서 인간이란 어떤 관계 속에 들어가면 그 관계에 따라 쉽게 변형되기 마련이다. 물이 그릇에 들어가면 그릇 모양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듯이.


부끄럽게도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음에 안도와 감사로 살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JTBC 보도 총괄이었던 권석천 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을 수시로 의심해보라고 권한다. 지금 스스로 괜찮은 사람으로, 나의 옳음을 외치며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살고 있다. 나라고 예외일 수 있을까? 아님을 너무 잘 안다.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며 살아가지만 번번이 실수하고 지금까지 정의이고 옳다 여겼던 관습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의인 양, 상대를 위한 행동인 것처럼..

 

p25 한 가지 특징이 더 있네. 자기가 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방을 악마 화하기 시작하지. 자기 맞은편에 서 있는 인간은 동등하게 대우할 존재가 아니라고, 그러니 내 맘대로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네. 검은 눈으로 보면 모든 게 검게 보이는 거랄까.


점점 나이 먹어가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에서 고착화시키지 않아야겠다는 의지가 있지만 순간순간 놀랄 때가 있다. 학습된 익숙함은 너무 자연스럽게 노출되고 아무리 막아도 여기저기에서 툭툭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예의를 가지고.. 품위를 잃지 않으며 살고 싶다.”

권석천 님의 통찰력은 탁월했고 읽으면서 "이분은 도대체 뭐지?" 이런 감탄을 하며 책장을 넘겼었다. 어느 때는 사이다처럼 기분 좋게 시원했고, 또 한계를 느끼며 부딪히는 세상을 직면하게 되면서 암담하게 했던 책이다.

누구나 다 읽어보길... "이 책 안 읽은 사람 없게 해주세요." 기도가 저절로 나오는 인생 베스트셀러 소중한 책이다.


p162 어제의 그 무엇으로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아야 해. 남들에게만 환골탈태하라, 분골쇄신하라 하지 말고 너희도 발본색원해서 환골탈태 좀 했으면 좋겠다. 지겨워서 더는 못 들어주겠어. 만날 우려먹는 헛소리들. 넌덜머리 날 만큼 들었으니 조용히 좀 하라고 제발.
p186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을 향해 “이젠 싫어졌다”라고 말하는 이들은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지금과 다른 세상을 여는 키워드는 이대론 살기 싫다고 외치는 ‘용기’, 그리고 그 용기에 어깨를 내주는 ‘연대’다. 남자들의 도덕률은 남자를 위해서도 폐기되어야 한다. 언제까지 이 무거운 지구를 자기들 거라고 들고 서 있을 것인가.
p236 진실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낫고, 누가 낫지 않고를 따지지 않는 일이다. “넌 진실을 말할 자격이 없어.” 이런 말이 나오는 순간 진실은 폭력이 된다. “우리가 말하는 진실은 틀릴 수 없다.” 이렇게 믿는 순간 진실은 도그마가 된다. 십계명에 열한 번째 계명을 붙인다면 이것이다. “너 자신의 진실을 사랑하지 말라.”
p320 “로스쿨에 갔다. 세상을 구하고 싶었다. 알고 보니 세상을 구한다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 일은 많고, 돈은 안 되고, 세상은 구원을 원치 않는 눈치였다. 공평한 게 좋지만 그래도 이기고 싶었다. 의롭게 살고 싶었지만 앞서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냥 날 구하는 게 낫겠구나’ 생각하게 됐다. 정의는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자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피해자나 그 가족이 완전하지 않다고, 결함이 있다고 그들을 조롱하거나 비켜가서는 안 된다. ‘순수한 피해자’라는 도식은 피해자의 발언권을 박탈하려는 수작이다. 정의는 늘 불완전하고 삐걱거리지만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 숨 쉰다. 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향해야 하는 건 결과로서의 정의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정의다. 그 토론의 과정이 바른 방향으로 이어지기만 한다면, “가는 길에 결정할 수 있겠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