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니아 옷장 속의 대중음악사' -한국어문기자협회지 <말과 글> 中
봄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란 표현이 상투적일지라도 그에 꼭 들어맞게 변해가는 주변을 볼라치면, 또다시 상투적인 표현으로,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말을 도구로 하고 말을 목적으로 하는 직업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말공부에 대한 부담이 더해간다. 정확하고 적확한 표현을 위해, 참신하나 듣는 이들이 바로 공감할 수 있는 표현을 위해 책과 수다와 다양한 매체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말을 수집한다. 그 중 최고봉은 역시 시이다. 시인들의 천재성과 피땀눈물이 어린 시어와 표현을 넙죽 받아 챙겨 둔다. 감정적 소화불량으로 실제론 그저 쟁여둘 때가 더 많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다.
지난 한 해, 많은 ‘떼창’을 이끌어낸 아이콘의 노래 <사랑을 했다>에 주목한다. 어린이집에서 초등학교 운동장을 거쳐 중고등학교 교실에 이르기까지 이 노래의 열풍은 대단했다. 병아리떼처럼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이제 막 말을 시작한 아이들이 “사랑을 했다”며 노래를 불러 젖히는 진풍경을 낳았다. 그들보다 조금 큰 아이들은 “지각을 했다”, “게임을 했다” 등으로 개사해 자신들의 노래인 양 다양하게 불러댔다. 아이콘은 ‘초통령’으로 등극했으며, 노래는 현대판 ‘서동요’가 되었다. 전염성 강한 이 ‘사랑타령’은 어른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노래였다. 간단한 멜로디는 중독되기 쉬웠고, 어라, 가사도 씹으면 씹을수록 맛있다. 이별 한 번 쯤 해본 사람들에겐 뻔할 수 있는 단어들이 무심하게 툭툭 내뱉는 목소리에 얹혀 귀에 착착 감겨들다 가슴을 두드린다.
사랑을 했다 우리가 만나/ 지우지 못할 추억이 됐다
볼만한 멜로드라마 괜찮은 결말/ 그거면 됐다 널 사랑했다
우리가 만든 러브 시나리오/ 이젠 조명이 꺼지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 조용히 막을 내리죠
에이 괜찮지만은 않아/ 이별을 마주한다는 건
오늘이었던 우리의 어제에 더는 내일이 없다는 건/ 아프긴 해도 더 끌었음 상처가 덧나니까
널 사랑했고 사랑 받았으니 난 이걸로 됐어
나 살아가면서 가끔씩 떠오를 기억/ 그 안에 네가 있다면 그거면 충분해
사랑을 했다 우리가 만나/ 지우지 못할 추억이 됐다
볼만한 멜로드라마 괜찮은 결말/ 그거면 됐다 널 사랑했다
우리가 만든 러브 시나리오/ 이젠 조명이 꺼지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 조용히 막을 내리죠
갈비뼈 사이사이가 찌릿찌릿한 느낌/ 나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눈빛
너에게 참 많이도 배웠다 반쪽을 채웠다/ 과거로 두기엔 너무 소중한 사람이었다
나 살아가면서 가끔씩 떠오를 기억/ 그 안에 네가 있다면 그거면 충분해
사랑을 했다 우리가 만나/ 지우지 못할 추억이 됐다
볼만한 멜로드라마 괜찮은 결말/ 그거면 됐다 널 사랑했다
우리가 만든 러브 시나리오/ 이젠 조명이 꺼지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 조용히 막을 내리죠
네가 벌써 그립지만 그리워하지 않으려 해/ 한 편의 영화 따스했던 봄으로 너를 기억할게
우리가 만든 러브 시나리오/ 이젠 조명이 꺼지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 조용히 막을 내리죠
우린 아파도 해봤고 우습게 질투도 했어/ 미친 듯이 사랑했고 우리 이 정도면 됐어
사랑을 했다 우리가 만나/ 그거면 됐다 널 사랑했다
참으로 ‘쿨’한 이별노래, <사랑을 했다>의 가사는 시에서 따 왔단다. 아이콘 멤버 비아이가 못말(김요비)의 시 <그거면 됐다>를 읽고 시인의 허락을 받아 일부를 인용했단다. 음악(music)과 문학(literature)이 결합해 성공한 좋은 예란다. 이를 가리키는 ‘뮤터리처’(muterature)라는 억지스러운 작명까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아이돌 중 비아이 같은 친구들을 가리켜 ‘문학돌’이라 한다는 말에는 귀가 솔깃했다. ‘문학돌’들 덕분에 그들을 찬양하는 어린 친구들이 문학의 문을 즐겁게 두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무의미하게 대중들을 ‘낚아대는’ 가사들에 지쳐 ‘꼰대스럽게’ ‘요즘 것’들의 노랫말들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던 때라 더욱더 ‘문학돌’들이 반가웠다.
지금으로부터 86년 전, 당시 “레코드를 이용해 무서운 세력을 가지고 전파되”는 유행가 가사에 대한 쓴소리를 담은 글을 옮겨본다.
流行歌作詞問題一考 (上)
<동아일보 1933.09.22.3면>
歌謠(가요)의 流行(유행)이란 우리 人類(인류)가 文字(문자)를 必要(필요)로 하기 以前(이전)부터의 일이엇음은 다시 말하지 않더라도 너무나 明確(명확)한 事實(사실)에 틀림없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口傳民謠(구전민요)를 살펴볼 적에 한 地方(지방)의 固有色(고유색)이 잇는 것은 數篇(수편)에 不過(불과)함에 反(반)하야 그 大部分(대부분)이 大同小異(대동소이)한 內容(내용)을 가지고 잇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아모리 交通(교통)이 不便(불편)하든 時代(시대)이엇드라도 惑(혹)은 馬夫(마부), 惑은 商人(상인), 船夫(선부), 兵士(병사), 浪人(낭인), 시집가는 處女(처녀)들의 입을 거쳐 自由(자유)로운 歌謠(가요)의 傳播(전파)를 能(능)히 推測(추측)할 수가 잇는데서 別般(별반) 奇異(기이)한 感(감)을 가지지 아니하게 하는 바이다.
이와같이 우리들이 在來(재래)에 가진 바 歌謠(가요)가 이 사람의 입을 빌려 저 사람의 가슴을 울리고 다시 다른 사람의 귀로 이러케하야 같은 言語(언어)를 使用(사용)하는 民衆(민중)에게 모조리 알리워져 온것이엇지마는 時代(시대)는 바꼬여 모든 것이 商品化(상품화)한 오늘에 와서는 流行歌(유행가)라는 特異(특이)한 “레텔”을 가진 것이 이 代身(대신)에 레코ㅣ드를 利用(이용)하야 무서운 세력을 가지고 傳播(전파)되면서 잇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 暫時(잠시) 말해보고저하는 것도 卽(즉) 이 레코 l 드를 僞主(위주)로 하야 퍼지고 잇는 流行歌 歌詞(유행가 가사)에 대한 것을 問題(문제) 삼으려 하는 것이다.
- 중략-
무엇보다도 가장 만히 一半大衆(일반대중)을 接(접)하고 잇는 이 레코ㅣ드의 流行歌盤(유행가반)에 對(대)하야 우리는 도모지 이러타할 觀心(관심)을 채 가지지 아니하는 듯 싶으나 京鄕(경향)을 勿論(물론)하고 길거리마다 店鋪(점포)마다 또는 衣食(의식)에 조곰이나마 餘裕(여유)가 잇음즉한 집집마다 常備(상비)해두고 동리지 아니하는 일이 別(별)로히 없는 이 流行歌盤(유행가반)에서 긁혀나오는 一言一句(일언일구)를 어찌 無心(무심)히 날려보낼것이랴.
-중략-
이제 우리는 우리가 이미 레코ㅣ드에 依(의)하야 부르고 잇는 所謂(소위) 流行歌 歌詞(유행가가사)의 一部(일부)를 例擧(예거)해가면서 暫時(잠시) 생각해가고저한다.
여러분이 한동안 愛唱(애창)하든 “流浪(유랑)의노래”와 “落花流水(낙화유수)”에는 다가치 “참아그리워”란 句(구)를 使用(사용)하엿는데, 이 “참아”란 말은 勿論(물론) “하도”나 “몹시” 의 뜻이겟지마는 우리 올바른 말의 “참아”란 반드시 그 밑에 否定(부정)하는 動詞(동사)가 오지 않고서는 써지지않은 副詞(부사)인 것은 우리의 항용 쓰는 對話(대화)를 例(예)들어보아도 알만한 일이아닐까.
또 “외로운봄”이라는 노래에 바라보니 ‘千里(천리)가 그리운 저곳 꿈길조차 아득해요 가을밤 三更(삼경)’ 이라고 한 것은 여간머리를 기웃거리며 解釋(해석)해 보지 않고서는 모를 句節(구절)이며 “靑春行進曲”(청춘행진곡)이란 노래의 첫머리 ‘鬱憤(울분)과 詠嘆(영탄)의 목을 잡어 비틀고 努力(노력)과 奮鬪(분투)의 돛을 높이 달고서’ 라는 것이나 또는 “해지는 沙漠(사막)”의 ‘비라미트 그림자는 세모가 지고 내마음의 그림자는 두모가 진다’ 等(등)의 象徵的 詩句(상징적 시구)는 알기 힘든 句節(구절)이라 그 意味(의미)부터가 不得要領(부득요령)의 感(감)이 잇지마는 流行歌(유행가)라는 이름을 붙이는 勇斷(용단)에 嘆服(탄복)할 따름이다. 噯라 우리 民衆(민중)은 어찌하여서 이러한 노래만을 즐겨 불러야 될것이냐.
이 글에 등장하는 노래들 가운데, <낙화유수>는 한국 최초의 창작대중가요로 알려진 노래로, 당시 <오빠 생각>, <뜸북새>등 동요를 취입한 최초의 동요 가수였던 이정숙에 의해 불려 1929년 4월 콜럼비아사에서 나온 곡이다. 노래 가사 중 “멀고 먼 님의 나라 차마 그리워”에 쓰인 ‘차마’란 부사를 잘못 썼다는 이유로 지적을 당하고 있다. <외로운 봄>은 가사의 비유가 너무 지나치다고, 1932년에 설립된 ‘오케레코드’에서 나온 <청춘행진곡>이나 <해지는 사막>은 유행가답지 않게, 감히, 너무 많은 소양이 필요한 상징적 구절을 썼다고 한소리를 듣고 있다.
噯라, 요즘 말로 “에혀...”를 붙이며 일단락 지어진 위의 글을 보며, 그로부터 90년 가까이 흐른 지금의 유행가 가사를 들여다보니, 내, 그, 불만족스러운 가사들을, 어찌, 일일이 예거하며, 나의 유감 섞인 이야기를, 다, 쏟아놓을 수 있을지 난감할 따름이다. 고로, 그 난감한 일을 하는 대신 ‘다양성’에 방점을 찍고 조금은 멀찍이서 그저 ‘낚아대는 노래들’도 관대하게 봐줄 참이다. 어차피 듣는 이들의 사랑과 외면 사이에서 그 명멸이 판가름 날 것이기 때문이다. 듣는 이의 마음 속 거문고를 울리는 가사를 가진 노래들이 적지 않고, 지나온 시대마다 당시의 여러 ‘문학돌’들이 만들어놓은 역작들이 너무도 많기에, 또 새로이 만들어지는 수작들도 많기에, 그래, 그거면 됐다.
시인의 시가 그대로 음악의 옷을 입은 노래들도 있고, 시 <그거면 됐다>가 노래 <사랑을 했다>로 새롭게 태어나듯 그 색깔을 달리 한 것들도 많다. 시대적으로 멀리는 김소월, 박인환, 김광섭, 서정주, 정지용, 윤동주부터 가까이는 김남조, 고은, 정호승, 류시화, 정지원 등 노랫말로도 사랑받는 시를 탄생시킨 문학인들 덕분에, 그 시어에 너무도 멋진 소리를 입혀 우리 앞에 가까이 데려다놓은 작곡가들 덕분에, 대중음악의 문법 안에서 평이한 말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건드려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게 한 작사가들 덕분에, 그 재료들을 멋지게 소화해 들려주고 보여주는 가수들 덕분에, 그 결과물을 기꺼이 일상 안으로 들여와 제대로 느끼며 흠뻑 즐길 줄 아는 대중들 덕분에 오늘날 우리 ‘유행가’들이 더 단단히 뿌리를 박고 여기저기서 화사하게 꽃을 피우고 있으니, 그거면 됐다. 에헤라! 바야흐로 봄이다,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