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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ug 09. 2019

낀 세대 80년대생의 비애

70년대생 선배와 90년대생 후배 사이에서 먹는 눈칫밥



최근 대통령이 청와대 직원들에게 선물하면서 화제가 된 책이 있다. <90년대생이 온다>! 언론에서는 앞 다퉈 새로운 세대의 출현에 호들갑을 떨며 주목하고 있다. 사실, 90년대생이 오는 중이 아니라 그들은 이미 우리 사회 한가운데와 있다. 나는 현업에서 열심히 일하는 많은 90년대생을 만났다. 사회생활 15년 차인 나는 70년대생 선배와 90년대생 후배 사이 허리 역할을 하는 80년대생 중 1인이다. 선배들이 잘 이끌고, 후배들이 아무리 잘 따라와 준다고 해도 그들 사이에 낀 세대 80년대생 나름의 외로움과 괴로움은 분명 있다.  


물론 회사 by 회사, 상황 by 상황, 사람 by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동년배들과 낀 세대의 괴로움을 얘기하다 보면 얼추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자칫하면 70년대생 선배들에게는 후배들 실드만 치는 ‘착한 선배 증후군’에 걸린 존재가 된다. 또 90년대생 후배들에게는 70년대생 보다 더한 ‘젊은 꼰대’가 되기 십상이라는 고민에 휩싸인다. 우리는 선배들에게도 후배들에게도 박쥐 같은 존재다. 그래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할 때마다 엄격한 자기 검열을 한다. 그리곤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착한 선배 증후군 환자인가? 아니면 젊은 꼰대인가?


업무 - 받은 만큼만 일하겠습니다

맞는 소리다. 처음 약속한 업무 외의 일이 늘어나면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직장은 더 이상 자아실현의 장이 아니다. 그저 생계유지를 위한 돈과 노동을 교환하는 장소일 뿐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고, 물가가 올랐는데 70년대생 선배들은 여전히 과거에 갇혀 자신이 막내 시절에 받았던 임금만 생각한다. 그리곤 요즘 애들은 하는 거 없이 많이 받는다고 말한다. 일은 세분화되고, 방대해졌는데 단순했던 여전히 그 시절을 벗어나지 못한다. 최저시급을 겨우 면하는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면서 뭐라도 더 시키지 못해 안달이다.


80년대생들이야 저임금도 내가 일정 수준 이상의 능력을 갖추기 위한 수련 기간이자 인생투자의 개념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해도 더 나아질 거란 희망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90년대생들에게 그런 희망을 품는 것조차 사치다. 자신들의 10년 후, 20년 후의 모습인 선배들의 모습이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헌신하다가 헌신짝 된 선배들의 오늘을 보며 ’딱 받은 만큼만 일하자 ‘ 다짐할 뿐이다.   


그렇다면 90년대생들은 받은 만큼의 사회생활에 대한 애티튜드를 갖추고 있을까? 그 부분에 대해 나는 물음표다. 책임보다 권리에 대한 설익은 주장이 먼저였다. 책임을 다하지 않는 채 벌려 놓은 일은 마무리하지 않고 나 몰라라 도망쳐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기분이 태도가 되어 분위기를 흐리는 건 애교로 봐줄 수 있다. 금요일 저녁 퇴근 직전에 ‘상의’가 아닌 퇴사 ‘통보’를 해왔을 때 나는 당황을 넘어 분노했다. 회사가 지급하는 임금 안에는 업무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의 수고 비용이 포함되었다는 걸 잊은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놀라웠다. 그것은 본인들이 당당하게 말하던 성숙하고, 프로다운 행동은 분명 아니었다.


회식 - 1차로도 충분하지만 안 하면 더 좋습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팀이 얼추 갖춰 가자 회식자리가 마련되었다.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으로 하는 70년대생 선배들은 말했다. ‘이게 다 팀을 위한 거야. 밥 정, 술 정이 쌓여야 친해지는 거고, 서로 친해져야 일해지기 편해. 다 너네 잘되라고 시간 들여, 돈 들여 만든 자리니까 편하게 즐겨 ‘ 이 말을 듣는 90년대생 후배들의 표정은 결코 편해 보이지 않았다. 하나같이 도축장에 끌려온 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극히 내향적인 성향의 나도 이런 회식이 마냥 달갑지는 않다. 하지만 어떤 의도와 어떤 의미로 마련한 자리인 줄 알기에 비즈니스용 미소 가면을 장착한 채 앉아 있었다. 반면 후배들은 영혼 없는 표정으로 구석자리에 모여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며 빨리 이 지루한 시간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이렇게 70년대생 선배들이 고수해 온 생존 방식이 90년대생들에게 전혀 먹히지 않다. 자신들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조금이나마 덜어 주기 위한 70년대생들의 호의(?)는 수구 꼰대들의 방식으로 평가절하되곤 한다. 처음에는 난 이 친구들이 회식이 진심으로 싫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의 속내는 달랐다. 강요하는 분위기에 반발심이 생겼다고 했다. 친해지고 싶으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친해질 텐데 왜 의무인양, 분위기를 조성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이런 후배들의 분위기를 알기에, 갈 사람은 가라며 분위기를 정리하고 쓸쓸하게 남을 선배들을 모시고 2차 자리로 향했다. 술을 잘 마시지도, 술자리를 즐기지도 않지만 선배들의 기분을 맞춰주고, 후배들을 실드 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회식이 끝나고 내게 돌아온 것은 선배들만 위한다는 후배들의 불만, 너만 착한 선배 되려고 후배들 편만 든다는 선배의 꾸지람이었다. 무슨 짓을 하든 양쪽의 욕을 먹는 건 낀 세대의 숙명이다.   


격돌 - 우리 모두는 참지 않긔
시간은 흘러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마지막 회식자리였다. 예상치 못하게 계획했던 일정보다 빨리 찾아온 쫑파티였다. 팀 내부 상황과 별개로 외부의 힘에 의해 프로젝트가 갑작스레 멈추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간 모두의 고생을 위로하는 회식 자리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90년대생 후배가 고추냉이처럼 맵게 톡 쏘는 한 마디 던진다.


“아니 무슨 마지막 회식을 냉삼 집에서 해요? 요즘 누가 냉삼 먹는다고... 참나”


가뜩이나 초상집 같던 회식자리는 찬물을 끼얹은 듯 냉랭해졌다.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이었다면 그 누구도 웃지 않은 실패한 농담이었고, 진심이었다면 솔직함을 가장한 무례함이었다. 어쩌면 그 후배에게는 팀의 분위기보다 자신의 기분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늘 이런 식이었다. 회의 시간엔 귀를 닫은 채 싸울 듯 달려들었다.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불만이 얼굴과 행동에서 드러났다. 때로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에는 열정이 뜨거워서 그런 줄 알았다. 그저 몇몇 사람의 유별난 성격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람이 달라졌어도 반복되는 상황을 겪게 되면서 이것이 바로 적지 않은 수의 90년대생들이 가진 성향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집에서는 애 기죽을까 봐 대신 세상과 싸워주던 부모들이 있었고, 학교에서는 적극적인 자기주장과 개성의 중요성을 교육받아 온 90년대생에게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문제는 얌전히 듣고 있을 70년생도 아니라는 거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살짝 술이 오른 선배의 날 선 말이 후배를 향해 날아들었다.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계획한 대로 프로젝트를 마무리 못했다는 자책,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가 폭발한 70년대생 선배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자칫 말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는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서 개복치 80년대생만 양쪽 눈치를 보고 있다. 처음에는 꽤나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상황이 반복되면서 양쪽으로부터 쏟아지는 욕콤보를 안고 가는 낀세대의 업보라는 걸 알기에 적당히 양측의 기분을 맞춰 준다. 그게 내가 택한 생존 방식이다.




어느 판에나 선배답지 않은 선배, 후배답지 않은 후배는 존재한다. 70년대생은 이렇고, 80년대 생은 이래, 그리고 90년대생은 이렇지 라고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깡그리 매도할 순 없다. 후배들은 선배들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던 노력과 능력을 ‘꼰대’라는 이름으로 평가 절하해서는 안된다. 선배들은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파악하고 요즘 세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다. 그 사이에 낀 80년대생은 그 둘 사이의 다리가 되어 상대방의 언어를 통역해 주고, 완충제 역할을 해야 한다.   


나는 궁극적으로 90년대생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조직보다 나, 성공보다 행복, 워라밸 등등-이 하루빨리 이 사회에 넓게 자리 잡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 목표가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선배들의 시행착오를 타산지석 삼을 필요가 있다. 과거가 없이는 현재가 없고 또 현재 없이는 미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배들도 언젠가 선배가 되고, 선배들의 자식은 또 이제는 선배가 된 후배의 후배로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회는 굴러가고 또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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