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근교 당일치기 여행지를 고민 중인 당신이 기억해야 할 도시
런던에 처음 갔다면 당연히 그 영화 세트장 같은 런던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란다. 하지만 런던에 길게 머물거나 런던을 재방문하는 여행자라면 근교의 작은 소도시들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런던 근교의 여행지 중에서 내가 추천하고 싶은 곳은 영국 남부의 소도시, 브라이튼이다. 거대한 하얀 석회암 절벽인 ‘세븐 시스터즈‘ 덕분에 인생샷 성지로 불리는 그곳이다. 나도 사실 처음에는 세븐 시스터즈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했다. 시차 때문에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비비고 이른 아침,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하지만 나의 목적지는 세븐 시스터즈가 아니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세븐 시스터즈에 가기 위해 유럽 여행 카페를 통해 동행을 구하려 애썼다. 4인 티켓을 끊고 기차를 타고 가면 비용도 저렴하고, 외롭지도 않았겠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는 깨끗이 포기했다. 한창 여행을 즐기는 20대 초중반의 청춘들에 비해 거의 열 하고도 몇 살은 더 많은 나의 나이가 버거웠나 보다. 몇 번 까이고 나니 곱게 그럼 내가 포기할 줄 알고? 그따위에 마음의 상처를 입을 사람이 아니다. 난 금전적 여유도 심리적 여유도 충분히 가진 나이였다. 시작의 삐끄덕한 마음은 덩달아 세븐 시스터즈에 대한 애정마저 짜게 식는 마법을 부렸다.
그럼에도 나는 홀로 브라이튼으로 향했다. 나의 목적지는 세븐 시스터즈 바로 옆의 벌링갭이 있기 때문이다. 세븐 시스터즈에 가봤자 20대 청춘들의 뜨거운 인증샷 속 지우고 싶은 엑스트라가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당시만 해도 북적이는 세븐 시스터즈에 비해 한결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라고 하기에 두 번 고민하지 않고 나의 목적지를 벌링갭으로 비틀었다.
브라이튼에 도착하자마자, 버스에서 내려 제일 먼저 버스 티켓부터 바꿨다. 런던에서 출발할 때, 왕복 티켓으로 끊었던 티켓의 시간을 막차로 변경한 것이다. 인종의 용광로라는 말처럼 사람으로 빽빽하던 런던과는 전혀 다른 한적하고, 한가로운 분위기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벌링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전, 점심거리를 샀다. 쌀알이 간절했지만, 미리 봐 두었던 도시락 전문점은 아직 문을 열기 전이었다. 결국 슈퍼마켓에서 볼품없이 건조한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를 사서 가방에 욱여넣고 벌링갭으로 향했다.
해안도로와 숲길을 오가며 곡예하는 달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1시간여를 달리면 먼저 세븐 시스터즈에 도착한다. 모두들 우르르 내리지만 동요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나의 목적지는 세븐 시스터즈가 아니라 벌링갭이기 때문이다. 벌링갭 코앞까지 데려다주는 버스는 주말에만 운영했기 때문에 평일에 간 나는 큰 도로에 내려 벌링갭까지 한참을 걸어야 했다. 버스가 큰 도로 정류장에 내러 주면 사람은커녕 나무와 초원 그리고 양만 가득한 한적한 길을 걸었다. 구글맵을 인도자 삼아 그가 안내하는 길로 한참 걸었다. 머릿속에서는 홀로 여행을 떠났다가 실종되는 스릴러 영화의 줄거리들이 연신 재생됐다. 쫄보가 혼자 여행을 하려면 이런 상상 속 사건들과 끊임없이 싸워서 이겨야 한다. 길가다 종종 마주친 다람쥐와 양의 선한 표정으로 스릴러적 상상들을 덮었다.
마음 졸이며 걷던 쫄보의 코에 비릿한 바다 냄새가 파고들었다. 벌링갭이 멀지 않는다는 신호다. 마음은 안정을 찾았고, 지쳤던 발에 사뭇 힘이 들어갔다. 멀지 않아 내 눈앞에는 끝도 보이지 않는 대서양이 펼쳐졌다. 그 넓은 곳에 나를 제외하면 가족 여행객 한 팀, 중국계 커플 한 팀, 20대 아가씨 여행객까지 해서 총 10명도 되지 않는 사람들뿐이었다. 새하얀 석회암 절벽에 부딪히는 짙푸른 파도 소리. 눈으로, 귀로, 코로 얼음 가득한 시원한 탄산음료 한 잔을 마신 기분이었다. 쉴 새 없이 얼굴을 강타하는 바닷바람이 뉘운 짧은 잔디를 밟고 조심조심 절벽 쪽으로 향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쫄보는 끝까지는 엄두도 못 내고 멀찍이 서서 대서양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바람 때문에 머리는 산발이 되고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꼭 봐야 할 게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면 오른쪽으로는 세븐 시스터즈의 절경이 펼쳐진다.
세븐 시스터즈의 절경을 제대로 보려면 역시 벌링갭이다. 에펠탑의 매력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에펠탑 바로 코앞보다 사이요궁에 가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뭐든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인간관계도, 사랑도, 삶도. 어수룩할 때는 그저 바짝 가까이 가야, 뜨겁게 달려들어야 진심이 전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여러 번의 실패 후, 관계에는 늘 숨이 들고 날 ’ 숨길’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야 관계가 썩지 않고, 오래 유지된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벌링갭 언덕에 앉아 대서양을 바라보며 지나간 관계들을 떠올렸다. 과거의 나님이 택했던 좋은 선택, 나쁜 선택들 속 수많은 관계들... 그것들이 모여 결국 오늘의 단단한 나를 만들었다.
싸온 샌드위치도 먹고, 사진도 찍고, 음악도 듣고, 또 한동안 멍하니 대서양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에 잠기니 어느새 해가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뚜벅이 쫄보 여행자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돌아갈 준비를 했다. 아까 버스에서 내릴 때, 건너편 정류장에 가서 찍어둔 버스 시간표를 확인하니 빠듯하다. 다시 돌아가는 길은 기분이 달랐다. 가보기 전까지 얼마나 걸릴지, 어떤 분위기의 길인지 몰라 스릴러 영화 속 피해자가 되는 건 아닐까 종종거리며 걸었던 길은 사실 한없이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이제는 결코 다시 느끼지 못할 그 분위기를 만끽하며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그리곤 다시 브라이튼 시내로 돌아와 미리 봐 두었던 <Harry Ramsden's>로 향했다. 영국의 대표 음식(?) 피시 앤 칩스를 먹기 위해서다. 체인점이라 영국 곳곳에 지점을 두고 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뒤늦게 만든 레트로풍이 아니라 세월의 때가 곳곳에 묻어나는 진짜 레트로였다. 관광객도 물론 있었지만 동네에 사는 가족, 친구, 연인들이 소박한 식사를 하는 공간이었다. 나도 그 사이에 끼어 피시 앤 칩스를 맛봤다. 두툼한 생선살과 고소한 감자튀김. 파블로프의 개처럼 맥주가 간절했지만 알코올 한 방울만 들어가도 홍조가 파운데이션을 뚫고 나오는 체질이라 애써 참았다.
그리고 마지막 코스로 점찍어둔 브라이튼의 랜드마크, 브라이튼 피어(Brighton Pier)로 발길을 옮겼다. 해상에 길게 설치된 플랫폼으로 전시시설과 놀이시설, 휴게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여름 성수기가 지나서인지 살짝 썰렁하긴 했지만 로맨틱 영화의 10대 주인공들이 첫 데이트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나를 맞이했다. 전성기는 훌쩍 지나 빛바랬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추억을 선사하는 공간. 시끌벅적하게 게임하는 10대 친구들, 조용히 데이트하는 연인, 아이의 웃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애쓰는 가족 등 각자 자기들의 방식으로 브라이튼 피어를 즐기고 있었다.
시끌시끌한 브라이튼 피어 한가운데 벤치에 앉아 오늘 하루를 되짚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자그마한 동양인 여행자는 비현실적인 현실이 가득한 하루를 보냈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인공처럼 신기함과 두려움에 휩싸여 두리번거리며 걷던 벌링 갭으로 향하는 길, 쓸쓸한 멜로 영화의 배경 같던 벌링갭에서 바라본 세븐 시스터즈의 새하얀 석회암 절벽 절경, 그리고 10대로 돌아가 설렘 설렘 한 첫 데이트를 하고 싶은 아기자기하고 빈티지한 브라이튼 피어까지... 런던과는 또 다른 여유롭고, 따뜻한 도시 브라이튼에서의 기억들이 오래도록 여행자의 가슴에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