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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Sep 20. 2019

거창할 필요 없는 여행의 목적

  출발은 가볍게, 그리고 돌아올 때는 더 가볍게


또 가? 여행을 왜 그리 좋아하냐? 여행 갈 돈이 그렇게나 많아? 여행이 밥 먹여 주냐? 여행을 좀 다닌다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얘기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말이다. 처음에는 내가 느꼈던 여행의 좋은 점을 입이 부르트도록 설파하고 다녔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눈을 반짝이며 말을 해봐도, 상대편에서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면 나의 진심은 허공 속의 빈 메아리가 될 뿐이다. 돈이 많아서 가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남아돌아서 가는 것도 아니다. 외국어를 잘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여행을 다녀오면 인생의 엄청난 변화가 생겨서 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여행이라는 행위를 하는 나를 좋아하는 것일 뿐이다. 사진이건, 삶의 이유건 뭘 대단한 걸 챙겨 오려는 욕심을 가지고 떠난 여행의 끝은 늘 허무했다. 그래서 출발은 가볍게, 그리고 돌아올 때는 더 가볍게! 그것이 바로 내 여행의 모토다. 여행의 목적은 꼭 거창할 필요가 없다.



나는 보통 여행을 하기 전, <To Do List>를 작성한다. 가능한 사소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내 인생의 두 번째 유럽 여행의 출발점은 <레알 마드리드 홈구장에 가서 털북숭이 스페인 아저씨들 사이에서 ‘알라 마드리드(레알 마드리드의 응원가)’를 외치고 싶다!>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매 경기를 챙겨 보는 찐덕후는 아니지만, 세계 축구의 성지 중 한 곳에 가 보고 싶다는 욕심인 것이다. 그래서 주 여행지는 마드리드가 있는 스페인, 그리고 스페인만 가기 아쉬우니까 바로 옆 나라 포르투갈을 가게 된 것이다. 거기에 블랙 시트 사태로 인해 파운드화가 급락한 김에 나름 마음의 고향, 런던과 에든버러까지 확장됐다.


별 준비도, 별 기대도, 별 정보도 없이 떠난 여행이라 뭐든 신기했고, 뭐든 즐거웠다. ‘hola’ 한 마디면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는 아이부터, 흰 수염이 얼굴의 반을 덮은 할아버지까지 대화가 통했다. 깊은 대화는 아니어도 따뜻한 친절을 받고, 그에 대해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정도의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인종은 분명 다르지만 스페인에 외할머니가 계시다면 이런 음식을 해주지 않았을까? 싶은 푸짐한 음식을 대접받기도 했다. 유명 관광지나 찍고 다녔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일들이 내게 펼쳐졌다. 프랑스나 영국 사람들보다 훨씬 수다스럽고, 따뜻하고 소박한 이베리아 반도 사람들의 정을 제대로 느낀 여행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모든 건 국민 배신남이 된 호날두가 만들어 준 인연인 것이다.



매년 10월이 되면 문경이 떠오른다. 사람 많은 곳은 질색하는 내가 한창 사과축제로 들썩이던 문경새재에 간 건 순전히 스타벅스 때문이었다. 그해 스탬프 투어라는 이름으로 이벤트가 진행되었다. 국내의 아름다운 스타벅스 지점들에서 찍은 스탬프를 모으면 연말에 뭔가 특별한 선물을 준다는 이벤트였다. 스탬프 덕후였던 지인의 제안으로 여행에 동참했다가 나중에는 내가 더 적극적으로 여행을 주도했다. 스탬프 투어 덕분에 자의로라면 결코 가지 않았을 지방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순례했다.


10월의 문경은 단풍이 한창이었다. 문경새재 입구에서 산채 정식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 후, 소화를 시키기 위해 일행들과 문경새재를 걷기로 했다. 단풍보다 더 알록달록한 등산복 차림의 관광객들 무리를 지나, 한적한 길이 나왔다.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곳곳에 알밤이 떨어져 있었다. 형형색색 단풍은 우리의 머리 위를 뒤덮어 마지막 발악을 하듯 뜨거운 가을 햇빛을 가려주었다. 산에서 부는 청량한 바람이 살짝 솟아오른 땀을 식혀 주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가을에 여행을 떠나는구나 새삼 느꼈다. 그 순간이 문경 여행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드는 한 컷이다.  


그전까지 나는 #사과 #문경새재라는 두 단어를 제외하면 문경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어떤 고장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스타벅스 때문에 가게 된 문경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당일치기 여행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시간은 많지 않았다. 문경이 이렇게 내 취향인 줄 알았다면 1박 이상의 여행을 계획했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을 털어내고 여행의 이유였던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스탬프를 찍은 후 서둘러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를 태운 버스가 문경을 떠나기 전까지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무르익은 햇빛과 나뭇잎들이 내지르는 함성소리에 귀가 시끄러웠다. 언제든 다시 오라고 뜨겁게 배웅하는 그 모습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



마카오에 가게 된 것도 참 단순한 이유였다. 매년 겨울,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막내딸과 함께 하는 뜨거운 겨울방학> 투어가 있다. 마음 같아서는 풍광 덕후 아빠를 위해 스위스를, 야경 마니아 엄마를 위해 체코 프라하를 모시고 가고 싶다. 하지만 내 통장 사정뿐만 아니라 장거리 비행을 하기엔 두 분의 체력이 허락하지 않는 나이다. 아시아 근교에서 이국적인 풍경을 보여 줄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 고민하다가 마카오를 택했다.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던 마카오라면 가까운 거리에서 유럽 느낌을 느낄 수 있겠다 싶었다. 포르투갈 리스본의 '파스테이스 드 벨렘(Pasteis de Belem)에서 먹었던 천상계의 디저트, 에그 타르트와 비슷한 포르투갈식 에그 타르트도 꼭 맛 보여드리고 싶었다.  


지금까지 다녔던 아시아와는 또 다른 분위기와 풍광에 부모님은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하셨다. 코끝에는 중화 풍 향신료 냄새가 스치긴 하지만, 고풍스러운 골목과 광장을 거닐며 유럽의 어느 작은 도시에 왔다고 상상하라고 애교 섞인 강요(?)를 했다. 비록 진짜는 아니지만 에펠탑도 인증샷도 찍고, 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를 먹으며 함께 못 간 유럽 여행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 진짜 유럽을 모시고 가지 못해 미안하다는 나의 말에, 부모님은 여기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끼리는 여기도 올 생각 못했을 거라고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다. 남들은 안방 드나들 듯 가는 유럽을 평생 가보지 못한 부모님을 생각하니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심사숙고하지 않은 나의 단순한 선택에도 감동해주신 부모님이 고마웠다.


사람들은 말한다. 여행은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계기가 되고, 또 나를 성장하게 만든 원동력이라고. 하지만 그건 다 결과론이고, 또 개인의 경험이다. 남들에게 맛있는 음식이 꼭 나의 입에도 딱 맞으리라는 법은 없다. 남들이 다 좋았다는 여행지가 내겐 최악의 추억으로 남기도 한다. 떠나는데 뭐 그렇게 거창하고 대단한 이유가 필요할까? 여행은 반드시 답을 도출해내야 하는 수학 문제가 아니다. 여행, 그 시작은 사소할수록 좋다. 지중해가 진짜 짠맛인지 손으로 찍어 먹어 보려고 떠날 수도 있다.(처음 니스에 갔을 때, 궁금해서 찍어 먹어본 1인이 바로 나). 라이스페이퍼로 만든 달랏 피자를 먹으러 베트남의 대관령, 달랏에 갈 수도 있다. 이렇게 출발점이 사소해야 기대도 없고, 실망도 없다. 여행의 목적은 오직 떠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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