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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Sep 30. 2019

‘괜찮아요 병‘ 완치에는 여행이 약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잃을 것부터 걱정했지



내가 태어난 이후, 가장 많이 한 말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문득 이 한 마디가 떠올랐다.


괜찮아요


여기서 ‘괜찮아요’의 의미는 실제로 괜찮아서 괜찮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이거 먹을래? 
괜찮아요


이거 같이 할래?
괜찮아요


여기 같이 갈래?
괜찮아요


이 사람 만나 볼래?
괜찮아요 


늘 이런 식이었다. 상대방에게 상처 주지 않고 우회적으로 거절을 하기 위해 ‘괜찮아요’라고 답했다. 내가 거절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거슬러 가보면 실패할 것이 두려워서였다. 먹었는데 맛없으면 어떡하지? 같이 했는데 잘 못하면 어떡하지? 갔는데 별로면 어떡하지?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잃을 것부터 걱정했다. ‘괜찮아요’라는 말로 스스로 팔다리를 자른 채 늘 방안에 웅크리고 라디오를 듣거나 티브이를 봤다. 인간 개복치에게 그것은 지상 최대의 낙원이었다. 이렇게 20대까지의 나는 성공할 희망이 없으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내향적인 사람이었다. 뭐든 해보지도 않고 스킵해 버리는 습관은 모든 것을 단조롭게 만들었다. 취향도, 일상도, 인간관계도, 생각도 심지어 식단까지도. 딱 라디오, 티브이 크기 만한 좁은 세상에서 살았다.


내가 ‘괜찮아요 병’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계기를 꼽자면 단연 ‘여행’이다. ‘여행’이라는 단어가 인생에 스미면서부터 난 분명 달라졌다.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평소처럼 뭐든 괜찮다고 사양하고, 거절했다. 하지만 시간 들여, 돈 들여 간 여행에서 ‘괜찮아요’라고 칼같이 잘라내기에는 뭔가 아까운 기분이 들었다. 내 입맛이 아니어도 먹어보고, 내 취향이 아니어도 해보고, 내 스타일이 아니어도 만나봤다. 아니 이게 웬걸? '도전'이라고 하기에는 과하고 딱 '시도' 정도가 적당했다. 그 시도의 결과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완전한 실패라 해도 경험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



언젠가 아프리카 세네갈의 현지인의 가정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먼 나라에서 손님이 왔다고 집주인님께서 현지 가정식으로 큰 상을 마련해 주셨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차려진 음식만 봐도 이방인들에게 큰 환대를 하고 있구나 느껴졌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쩨부젠(Thiebou Dieune)이라는 이름의 세네갈 전통 생선요리였다. 생선을 튀긴 기름에 쌀과 각종 채소, 토마토소스를 넣어 볶아 찐 후 튀긴 생선을 올려 먹는 음식이다. 넓은 접시에 넉넉히 담아 가족 여러 명이 둘러앉아 함께 나눠먹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다.


문제는 난 한국에서도 생선을 즐겨 먹지 않는 편이고, 여러 사람과 한 접시에 음식을 함께 먹는 것도 썩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정성스레 준비하신 음식을 앞에 두고 내 취향이 아니라고, 내가 먹던 스타일이 아니라고 거절할 수 없었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고 세네갈에 왔으면 세네갈 사람들을 따라야 하는 법! 거의 20명, 40개의 눈동자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대에 찬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며 용기를 내 크게 떠서 입으로 넣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생선 향이 강한 기름진 빠에야를 먹는 정도의 느낌? 밥알은 까슬까슬했고, 각종 향신료가 듬뿍 들어가 생선의 향이 코로 느껴지는 만큼 입안에서도 진하지는 않았다. 물론 꿀떡 삼켜질 만큼 내 취향은 아니었다.


Ça va? (괜찮아?)
Ça va! (응 맛있어) 


세네갈의 공용어인, 불어로 서툴게 음식 맛에 대해 전했다. 그리고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는 것으로 감사에 대한 인사를 대신했다. ‘생선‘만으로 거절했다면 난 대부분의 한국 사람처럼, 쩨부젠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용기를 낸 덕에 이름도 생소한 ’ 쩨부젠‘을 먹어 본 몇 안 되는 한국사람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다음에 혹 쩨부젠을 다시 먹을 기회가 온다면 난 지난 번에 먹어 봤기 때문에 이번에는 다른 맛보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베트남의 대관령이라는 고산도시 달랏은 지금까지 지냈던 호찌민, 무이네와 다르게 서늘했다. 서있기만 해도 땀이 주르륵 흐르던 호찌민, 무이네의 무더위에 지쳤던 우리 가족은 한결 수월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택시 투어를 하며 기사님과 코스 상의를 할 때, 달랏에서 유명하다는 다딴라 폭포를 넣었다. 그곳에 간 건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풍광 덕후인 엄마와 놀이기구를 좋아하는 아빠를 위한 선택이었다. 대단한 시설의 놀이공원이 있는 건 아니고 폭포까지 약 1㎞의 경사진 슬로프를 따라 루지라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려갈 수 있다. 자동센서로 앞사람과의 거리 제어는 물론이고 탑승자가 직접 액셀과 브레이크 조정이 가능하다. 누군가 나에게 이 루지를 타자고 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괜찮아요

놀이기구에 경기를 일으키는 나는 놀이동산에 가도 늘 짐 지킴이를 자처했다. 짐을 지키며 환호에 찬 괴성을 지르는 친구들을 보며 사진을 찍고 웃어 주는 게 나는 더 즐거웠다. 하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간 여행인 만큼, 내가 안 타겠다고 하면 부모님 역시 안 타실 게 분명했다. 눈을 질끈 감고 부모님과 함께 루지에 몸을 실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안전장치가 불안하긴 했지만, 이왕 타기로 한 이상 후퇴는 없다. 브레이크는 딱 한 번, 마지막 종료 시점에 속도를 줄이기 위해 잡은 거 말고 스트레이트로 달렸다. 초반에는 긴장을 해서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중간쯤 가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루지의 속도감 때문에 숲 속 나무들이 내뿜은 피톤치드가 더 세고 진하게 얼굴을 부딪혔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타지 않았을 ‘루지‘에 도전한 덕분에 엄마 아빠가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을 시간차 없이 확인했다. 때로는 내 취향이 아니어도, 시도해보면 분명 얻는 게 있다.



내향성 인간인 나는 남에게 침범받고 싶지 않은 일정한 물리적 공간인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를 중요시한다. 내가 침범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남들의 퍼스널 스페이스에 침범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런데 여행을 할 때면 이 퍼스널 스페이스가 무너지는 게 마냥 불쾌하지만은 않다. 포르투갈의 마지막 날, 어디서 포르투갈의 추억을 정리할까 고민하다가 여행 메이트와 자리를 잡은 곳은 리스본 코메르시우 광장 앞의 작은 해변이었다. 리스본에서 어디를 가든 수없이 그 광장을 지나야 해서 우리의 발걸음이 많이 닿아 있던 곳이었다. 현지 맥주와 과자 몇 개를 사서 해변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갈매기의 공격을 간간이 피해 가며 지난 포르투갈에서의 날들을 되짚어 보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유럽, 그것도 포르투갈의 작은 해변에서 갑자기 한국말? 아 또 뭐 팔려는 건가? 싶었다. 한국어 인사로 친근하게 접근해 물건을 팔거나 시선을 분산시켜 귀중품을 슬쩍하려는 술수인가 싶어 눈에는 까칠함, 입에는 ‘No Thanks’를 장전한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곳에는 금발의 사춘기 소녀 두 명이 잔뜩 수줍은 표정을 가득 안고 우리를 향해 인사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상황을 물어보니, 독일에서 온 친구 사이인 열다섯 살의 소녀 둘은 현재 부모님들과 여행 중이라고 했다. 가족 여행이 지루해 가족들과 떨어져 해변에 나왔는데 마침 나와 여행 메이트가 한국어로 대화하는 걸 듣고, 신기해서 한국어로 말을 걸어 보고 싶었다고 했다.


소녀들은 사실, 한국의 한 아이돌 그룹의 팬이었다. 한국어도 팬질을 하며 조금씩 익히는 중이라고 했다. 나도 기특하고 신기해서 소녀들에게 작은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마침 내가 그 아이돌 그룹의 멤버와 일을 한 적이 있어서 핸드폰을 뒤져 프로젝트 끝날 때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보여주었다. 진짜 그 아이돌을 만난 것 마냥 해변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큰 환호성을 질렀다. 소녀들은 고맙다며 가방을 뒤져 독일 사탕 몇 개를 건네주었다. 짧은 대화를 마치며 한국말 많이 연습해서 아이돌 보러 한국에 오게 된다면 연락을 하라고 이메일 주소를 전해 주었다. 물론 소녀들에게 메일이 오진 않았다.


포르투갈에서 지내면서 물론 좋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지갑을 노리는 소매치기나 강매하는 집시처럼 신경을 거스르는 사람들도 만났다. 후자들 때문에 잔뜩 경계심을 품고 있던 나였다. 하지만 소녀들은 ‘안녕하세요’ 하나로 견고한 나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무너뜨려 버렸다. 소녀들과의 만남은 작고 사소했지만 내게 많은 생각을 남겼다. 소녀들이 용기 내지 않았다면, 그리고 내가 평소처럼 낯선 이에게 '괜찮아요'라는 말로 철벽을 쳤더라면? 변방 작은 해변에서 내가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일면식 없는 소녀들에게 큰 환대와 함께 작은 캔디 선물을 받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K 팝의 인기를 몸으로 체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태생이 뭐든 처음일 수밖에 없는 여행자에게 시행착오는 숙명이었다. 여행이기 때문에 시도했던 일들의 경험을 안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여행을 떠나기 전만큼 새로운 시도가 마냥 두렵지 않다. 생각보다 결과는 나쁘지 않고, 또 실패하더라도 경험이 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여행하듯 일상을 살아가고, 일상을 살아가듯 여행을 한다. 여행 덕분에 알게 되었다. 내게 이제 실패는 없다. 단지 시행착오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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