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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Oct 08. 2019

당신의 인생에서 스킵해도 좋은 것들

인간 개복치였던 나를 닮은 오늘의 20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20대 때의 나는 몸무게가 지금 보다 5kg은 적게 나갔다. 그럼에도 지금 보다 몸도, 마음도 무거웠다. 머릿속에는 고민이 꽉 차 있었고, 마음속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남들은 저 앞에 가서 먼저 자리 잡고 있는데 나만 제자리에 있을까 봐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했다. 돌이켜 보면 나를 가장 힘들 게 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당장 해결되지 않을 문제들을 붙들고 끙끙거렸다. 그래서 시간을 되돌려 20대의 나를 만난다면 ’이 정도는 스킵해도 된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 말해주고 싶은 몇 가지가 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오지랖 넓은 조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의 장손인 아빠 덕분에 제사는 늘 우리 집의 몫이었다. 명절이나 제삿날은 자연스레 가족들이 모두 우리 집으로 모였다. 철없을 때야 평소 먹지 않는 각종 음식이 가득하고, 오랜만에 보는 친척들이 주는 용돈을 받는 날이라 더없이 즐거웠다. 하지만 성적, 외모, 대학, 취업, 결혼, 출산 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 세례를 받게 된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1년에 한두 번 보는 친척들의 안부 인사를 가장한 질문 공세가 할퀸 내상의 후유증이 꽤 길었다. 누구는 어느 대학에 가고, 누구는 어느 대기업에 취직해서 연봉이 얼마고, 또 누구는 결혼을 해서 벌써 애가 몇 명이고... 나도 나름 내 자리에서 남들한테 폐를 안 끼치고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한마디에 뒤처지고 모자란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친척들의 질문 공세에 이렇다 할 당당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는 자식을 지켜보는 부모님의 죄인이 된 눈빛이 마음에 흉터처럼 남았다. 그래서 어느 날부턴가 친척들이 모이는 날이면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어 피하곤 했다.

시간이 흘러 나도 질문을 했던 그 친척들의 나이와 얼추 비슷해졌다. 그제야 왜 그들이 그런 질문을 했는지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본 조카에게 어떻게든 말을 걸고 싶긴 한데 이렇다 할 공감대가 없으니, 으레 나이가 차면 겪게 되는 인생의 단계들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것이다. 평가를 하겠다는 것도, 비교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스몰토크에 익숙지 않은 세대의 서툰 관심의 표현일 뿐이었다.


이해는 어렵지만 인정은 쉽다. 대부분의 윗세대가 상대방을 향한 배려나 이해가 지금의 세대보다 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하면 그들과의 대화가 한 결 수월해진다. 이렇게 20대의 나는 인생에서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말을 하나하나 품에 안고 곱씹었다. 그들이 말하는 세상의 기준에 맞춰 나를 깎고 늘려가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원하는 모습을 갖췄을까? 절.대.불.가.능. 어차피 수백수천 가지 기준에 딱 들어맞는 완벽한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애정 어린 조언이야 당연히 귀담아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흩어지는 말까지 마음속에 담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가장한 오지랖은 적당히 스킵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남들이 하면 나도 꼭 해야 한다는 강박 

나의 20대를 돌이켜 봤을 때,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은 건 ‘남들의 눈‘이었다. 남들이 했다는 건 다 해봐야 했고, 남들이 좋다는 곳은 다 가봐야 했다. 내 취향이란 게 없었기 때문에 유행에 휩쓸려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녔다. 별 관심도 없는 전시회에도 가고, 취향에 맞지 않은 사람들과도 어울렸다. 어디 가서 ’ 이거 알아?‘라고 했을 때 ’ 모른다’고 말하는 게 자존심 상했다. 빚을 낼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없는 돈과 시간을 쪼개 ‘경험‘에 투자했다. 20대의 나는 어리석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다는 게 나에게도 좋은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쌓이고, 경험이 늘면서 남들이 좋다는 게 꼭 나에게도 좋은 게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모두가 하는 경험을 내가 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자라거나 틀린 게 아니었다. 남들이 파리에 가서 다 루브르 박물관을 간다고 해서 루브르 박물관에 안 간 내 여행이 망한 것은 아니다. 루브르 대신, 동네 구석의 작은 빵집에서 ‘인생 바게트‘를 만나는 유니크한 경험이 나에게는 더 의미 있는 일일 수 있다. 그것을 깨달은 건 20대가 한참 지난 후의 일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리다의 문제는 아니다. 다수의 경험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니고, 나만의 경험이 꼭 쓸모없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진다. 그래서 실수도, 실패도 좀 더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20대의 나는 실패 앞에 좌절했지만, 30대의 나는 툭툭 털고 일어나 다음 스텝을 준비할 힘과 여유가 있다.


20대를 낭비하면 인생이 망가진다는 Dog Sound

어쩌면 20대의 나는 사춘기 때 보다 더 많은 고민과 좌절 속에 살았다. 전학 한 번 없이 한 동네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생이 되어 좀 더 넓은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됐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는 20대가 되어서야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구나!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본인 자체는 물론, 본인이 좀 모자라도 그를 둘러싼 배경이 모자람을 채워 잘나게 된 사람들이 넘쳐 났다. 그에 비해 나는 가진 것도 변변치 않고, 그렇다고 이렇다 할 재능도 없는 쭈구리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재능도, 배경도 타고난 사람들과 경쟁이 안됐다. 좌절감에 휩싸여 자학하던 날들이 이어졌다. 학창 시절, 성적은 좀 부족하지만 어른들이 말하는 소위 모범생 부류에 속했던 나는 20대가 되어서야 일탈의 맛을 알게 되었다. 그래 봤자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거나, 클럽에 가고, 또 부모님께 다른 핑계를 대고 여행을 가는 정도밖에 못하는 쫄보였다. 그래도 일탈은 짜릿했고, 중독적이었다. 그런 나를 보며 누군가 말했다.


너 지금 이렇게 20대 낭비하면
나중에 어떡하려고 그래?
인생 망가진다
다 너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법의 테두리를 넘어선 일탈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가진 시간과 능력 내에서 저지른 일탈조차 누군가에게는 걱정거리였다. 그때는 정말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정신을 차리고 나를 단속했다. 그런데 20대를 훌쩍 지나고 보니 그때의 일탈이 없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좀 더 어릴 때, 철없이 망나니짓 좀 더 해둘 걸 하는 아쉬움마저 남을 정도다. 무슨 일이든 지나고 보면 경험이 되고, 교훈을 남긴다. 누군가에게 20대의 일탈이 낭비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들이 밑거름이 되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망가져 봤자 내 인생이고,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있다면 분명 회복은 가능하다. 인생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인생이 짧다고 생각하면 후회 없이 해보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 한다. 반면, 인생이 길다고 생각하면 젊은 날의 일탈로 낭비한 날들을 회복할 시간은 충분하다. 당신에게 주어진 날들은 정해져 있으니 어떻게 봐야 할지, 선택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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