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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Oct 31. 2019

아끼면 똥, 쌓아 두면 독

쌓아 두지 말아야 할 것은 불필요한 물건만이 아니야


6.25 전쟁 직후 세대인 엄마, 아빠는 무언가 버리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다. 아직 쓸만한데, 놔두면 언젠가 다 쓸 일이 있는데 왜 버리냐며 요즘 것들은 물건 귀한 줄 모른다는 돌림노래를 부르시는 분들이다. 이런 성향의 부모님 영향으로  나 역시 무언가를 버리는 행위 자체에 죄책감이 들곤 했다. 그래서 버리겠다 마음먹기까지 한동안 무작정 쌓아두곤 했다. 밀쳐둔 물건들에 먼지가 쌓이고 이 물건이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곤 한다. 그런 물건들이 하나 둘 내 방에서 영역을 넓혀 갔다. 폭탄 맞은 듯 복잡한 방 꼴을 보다가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새로운 무언가가 들어올 틈이 없었다. 쓸모없고 오래된 물건들 속에서 나도 쓸모없는 인간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내 인생에 쌓아 두지 말아야 할 것은 물건만이 아니었다.

 
감정을 쌓아두지 마세요

난 여러 면에서 서툰 사람이다. 외국어에 서툴고, 자전거 타기에 서툴고, 또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에 서투르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 당연히 서툰 것 투성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서툰 건 ‘상대방을 향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어릴 때는 감정을 표현하는 게 꼭 속마음을 들키는 것 같아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철저히 단속했다. 진짜 내 마음을 꽁꽁 숨긴 채 남들이 좋아할 가짜 감정의 가면을 쓰곤 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뭐든 꾹 참으며 괜찮은 ‘척’했다. 분노, 화, 슬픔, 짜증, 억울함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동시에 나에게는 ‘호구‘라는 이미지도 덧입혀졌다.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가만히 가마니가 되는 세상이었다. 주체 못 할 감정들을 끌어안고 끙끙 앓았다. 결국 그것들은 독이 되어 몸과 마음의 병으로 퍼졌다.


내가 정한 삶의 노선이자, 내가 택한 캐릭터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크게 한 번 무릎이 꺾인 이후 난 감정을 쌓아 두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상대방의 감정이 상하는 걸 걱정하기 전에 내 감정을 먼저 생각했다. 내 몸과 마음이 다치면서까지 배려해야 하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 솔직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의 솔직함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된다면 그 관계는 유효기간이 끝난 것이다. 그런 관계라면 굳이 연을 잇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대신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고마움, 행복함, 미안함, 속상함, 서운함, 아쉬움 등등 순간순간 우러나오는 감정들을 표현했다. 감정을 쌓아두지 않고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면서 인간관계는 단순해졌지만, 되레 깊어졌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지 않고 비로소 삶에 있어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됐다.


궁금증을 쌓아두지 마세요 

중학교 때 즈음으로 기억한다. 제일 좋아하는 과목인 사회 시간 중 난대림과 온대림, 냉대림에 대해 배우는 단원이었다. 이런저런 설명을 하던 선생님은 수업 시간이 끝날 무렵 습관처럼 궁금한 게 있으면 손을 들라고 했다. 사회과 부도를 보는 게 취미였던 단발머리 소녀는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난대림의 나무들은 잎이 넓고, 냉대림의 나무들은 잎이 뾰족한가요?”


나의 질문에 선생님은 뭘 그런 걸 다 질문하냐고 어이없다는 듯 피식하고 웃으셨다. 질문하래서 질문했는데 궁금증은 해결해주지 않으셨고, 대신 나에게 돌아온 건 핀잔뿐이었다. 나중에 백과사전을 뒤져, 궁금증을 스스로 해결했다. 생존을 위해 각 지역의 날씨에 따라 추운 지방은 침엽수로, 더운 지방은 활엽수로 진화한 것이다. 별게 아닌 답을 알고 나니 선생님의 그 어이없다는 듯 웃는 미소가 사춘기 소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깊이 박혔다. 그 이후 궁금한 게 있어도 선뜻 손을 들고 질문하기가 싫어졌다. 알아서 답을 찾았고, 적당히 짐작했다.


그 사건(?)은 트라우마가 되어 어른이 된 후 일에도,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에 대해, 사람에 대해 궁금증이 생겨도 직접 물어보는 걸 피하고, 섣부르게 짐작했다. 질문과 궁금증은 내 마음속 창고에 쌓아두고 앞서가서 제멋대로 해석하고 결론을 내렸다. 이 잘못된 생각은 불필요한 오해를 샀다. 결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나에게 안겨 주었다. 사람을 잃었고, 뒤늦게 후회했다.


그제야 정신이 차려졌다. 난 더 이상 삐친 사춘기 소녀 흉내를 내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을 수 없었다. 궁금하면 물어보고, 명확하게 이해가 될 때까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모르는 게 창피한 게 아니라, 모르는데 적당히 아는 척해서 감당 못할 일을 만드는 게 더 큰 문제다. 궁금증은 쌓아 둘 게 아니라 해소해야 할 존재라는 걸  끊임없이 머릿속에 되새기며 살아간다.


꿈을 쌓아두지 마세요

우리는 세상에 태어난 이후 끊임없이 꿈에 대한 질문을 받아 왔다. 그럴 때면 노벨상을 받는 과학자가 되겠다, 우리나라를 이끄는 대통령이 되겠다,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가 되겠다 거창한 장래 희망을 말하곤 했다. 꿈은 꼭 크고 대단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머리가 커가면서 “꿈이 뭐야?”라는 지겨운 질문에 신물이 났다. 꿈과 장래희망을 구분하지 않은 모호한 질문이 부른 참사였다.


어른이 된 후에도 ‘꿈에 관한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럴 때면 일확천금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로또 1등 당첨이 꿈이라고 말한 적 있다. 매주 토요일 밤, 잠들기 전 습관처럼 로또 1등 당첨금 확인했다. 이 정도 돈이면 몇 년이나 일하지 않고 여행을 다닐 수 있을지 상상을 하곤 했다. 언젠가 술이 얼큰하게 취한 밤, 친구들에게는 로또 1등 당첨만 되면 1등석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유럽 여행을 쏘겠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로또는 실제로 사지는 않았다. 나라는 인간의 팔자에는 당첨운이란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리석게도 생기지도 않은 감을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감나무 아래에 누워 기다리고 있던 거다. 행동하지 않는 자에게 기회는 오지 않는다. 로또를 사야 로또 1등 당첨의 기회라도 온다.


우리의 꿈은 고급 와인이나 위스키, 보이차가 아니다. 오랜 시간 숙성을 하면 풍미가 깊어지고, 값어치도 올라가는 그것들과는 분명 다르다. 꿈을 잔뜩 쌓아두고 숙성시킨다고 꿈의 가치나 실현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는다. 되레 먼지만 쌓이고 현실과 점점 멀어질 뿐이다. 꿈을 소중히 여길 게 아니라 자꾸 내 일상으로 끌어와야 한다. 로또 1등이 꿈이라면 로또를 사야 하고,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가는 게 꿈이라면 자금을 모으면서 부모님이 좋아하실 만한 여행지에 대해 정보를 모아야 한다. 책을 내는 게 꿈이라면, 꾸준히 내 이야기를 쓰며 글 쓰는 근육을 단련해야 한다.

 
사실 꿈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굳이 크고 대단할 필요가 없다. 어느 노래의 가삿말처럼 다음 달에 노트북 사는 거, 아니면 그냥 먹고 자는 거, 아무것도 안 하는데 돈이 많은 것이 될 수도 있다. 꿈의 크기보다 신경 써야 할 것은 꿈을 이루기 위해 꾸준히 방법을 찾고 또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리고 늘 꿈에 대해 예민한 촉을 바짝 세우고 있어야 한다. 언제 어떻게 기회가 올지 모르니. 시작은 막연하겠지만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다 보면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꿈이 분명 당신 가까이에 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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