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변잡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호사 Jul 16. 2020

립스틱이 부리는 마법

점점 짙은 색 립스틱에 손이 가는 이유

아뿔싸. 가방을 아무리 뒤져도 립스틱이 보이지 않는다. 기억을 거슬러 가본다. 집에서 나오기 직전, 화장대 앞에서 마지막 점검을 할 때 그냥 놓고 와버렸다. 온종일 ‘립스틱’ 없이 나는 어떻게 버텨야 하지? 아 이 사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빠르게 머리가 돌아갔다.  


손바닥만 한 크로스백은 평소 들고 다니는 파우치가 들어가지 않는 사이즈다. 그래서 딱 필요한 물건만 고르고 골라 넣는다. 파우더 팩트, 핸드크림을 대신할 샘플 크림, 두통약, 휴지, 이어폰, 보조 배터리, 카드지갑 정도가 한계다. 그런데 이렇게 마지막 점검을 하다가 화장대에 놓고 ‘립스틱’을 놓고 오는 일이 다반사다. 평소 파우치에 2~3개쯤 넣고 다니는 립 제품도 고르고 골라 놨는데 그 하나를 놓고 오니, 세상을 다 잃은 기분이 밀려든다. 마치 명동 한복판에 알몸으로 선 사람처럼 부끄럽고 허전하고 또 허망하다. 단지, 립스틱이 없을 뿐인데.


내가 립스틱의 부재를 깨닫는 순간은 대개 집을 떠나 지하철역이나, 사무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다. 무심코 얼굴 상태를 점검하다 생기를 잃은 입술에 립 제품을 덧발라야지 하고 가방을 뒤질 때, 내가 립스틱을 ‘또‘ 깜빡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럴 때, 해결방안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급한 대로 눈에 보이는 화장품 가게에 가서 아무거나 사거나 근처의 드럭 스토어에 가서 테스트용 제품으로 긴급 처방을 한다. 나의 선택은 대부분 후자다. 입술은 하나뿐인데 이미 나에게 수십 개의 립 제품이 있다. 다만 그게 모두 집에 있어서 문제지만.


눈도, 코도, 입도 작은 나는 진한 화장이 어울리는 편이 아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 화장을 시작한 이후 겨우 립글로스로 생기를 주는 정도로 입술 화장을 마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금만 짙은 색의 립스틱을 바르면 주변 사람들은 말했다.


 초등학생이 
엄마 립스틱 훔쳐 바른  같아


이런 부정적인 반응에 좀처럼 짙은 색 립스틱을 도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자연의 생기’를 서서히 잃어가면서, 인공 제품으로라도 생기를 채워야 했다. 한 해 한해 나이가 들고, 입술 본래의 색깔을 잃어 가면서 차츰 진한 색의 립스틱을 찾기 시작했다. 여전히 입술 전체를 꽉 채워 바르는 풀립(Full Lip) 스타일은 부담스럽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립스틱의 채도는 주름살의 개수만큼 높아간다. 점점 립스틱을 바르지 않고 밖에 나가는 일이 두려워지는 거다. 립스틱만 살짝 발라도 사회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기분이다.


"얘, 입술에 뭐 좀 발라. 꼭 아픈 사람 같아."  


언젠가부터 엄마와 함께 외출하는 날이면 늘 듣는 소리다. 엄마는 나의 ‘말하는 거울’이었다. 늘 잊지 않고 나의 입술 상태를 점검했다. 딸이 좀 더 예쁜 모습으로 세상에 당당하게 서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다. 함께 밥을 먹고 립스틱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입술을 보고 모녀가 나란히 립스틱을 채워 바르는 일은 이제 일상이다. 이제 엄마도 나도 립스틱 없는 외출은 상상할 수 없는 나이가 됐다.

나이가 들면 입술의 색소도 빠져서일까? 립 제품을 바르지 않으면 색이 죽은 입술이 얼굴 전체의 생기를 몽땅 빼앗는다. 아마 화장품 중 가격 대비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하는 제품은 립스틱이 아닐까? 고작 검지 손가락만 한 립스틱이 부리는 마법은 실로 놀랍다. 입술 안쪽에 톡톡톡 립스틱을 살짝 찍어 바르면 핏기 없는 얼굴에 마술처럼 활력이 되살아난다.


조금만 짙은 립스틱을 발라도 초등학생이 어른 흉내 낸 것 같다고 놀림을 받던 내가 이젠 어느덧 립스틱 없는 외출은 상상도 못 하는 ‘완연한 어른’이 되었다. 교복을 입고, 새빨간 립 로스를 바르던 내게 어른들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화장 안 해도 충분히 예쁜데 왜 벌써 화장을 하느냐고. 그때는 몰랐다. 탈선의 지름길로 여겨지던 ‘화장‘을 못하게 하려는 어른들의 잔소리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말을 하던 어른의 나이가 되고 보니 이제야 알겠다. 세상 그 어떤 화장품도 청춘의 생기 보다 효과가 좋을 수 없다고. 게다가 본래의 광채와 싱그러움을 내뿜을 수 있는 시기는 아주 짧다는 사실을. 그 찰나의 순간을 그대로 누리기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모두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엄마의 옷장에는 빨강, 꽃분홍, 주황 등 알록달록 원색에 호피 무늬, 일명 반짝이라 불리는 스팽글이나 비즈 장식이 가득한 화려한 옷들이 가득하다. 매번 색이고 패턴이고 과한 옷을 고르는 엄마에게 말했다.


“좀 고상한 옷 입으면 안 돼?”


“얘! 너도 늙어 봐라. 얼굴이 칙칙한데 옷까지 차분하면

사람이 생기가 없어 보여. 포인트가 있어야지 뽀. 인. 뜨.“


나도 엄마 나이쯤 되면 호피 무늬가 좋아질까? 지금이야 공짜로 줘도 마다하겠지만 단언도, 장담도 하지 않기로 했다. 화장하고 싶어 안달 났던 미성년 시절의 내가 어른이 되고, 화장을 이리도 귀찮아하게 될 줄 몰랐던 것처럼. 진한 립스틱을 내 돈으로 사는 일은 평생 없을 줄 알았던 내가 립스틱 없으면 외출을 못 하는 사람이 된 것처럼. 사람의 취향이란 나이가 들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니까. 젊어지려, 동안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시간과 취향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노화의 흔적을 시간 맞춰 온 친구처럼 반갑게 맞이하기로 했다. 그게 거역할 수 없는 순리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을 갉아먹는 습관성 ‘자학’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