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큐어를 바르며 생각한 ‘꾸준함’의 가치
매년 여름이 왔다는 걸 느끼는 순간, 빼놓지 않고 거행하는 나만의 의식이 있다. 하나는 겨울옷에서 여름옷으로 바꾸는 옷장 정리.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는 것이다. 작년 여름 이후 신발 속에 꼭꼭 숨겨둔 발톱이 세상 빛을 봐야 하는 때가 온 거다. 언젠가부터 밋밋한 맨발톱 상태로 샌들이나 슬리퍼를 신는 게 어색했다. 마치 민낯으로 번화가를 활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지만 나 혼자 민망해진다. 그래서 여름이 오면 손톱보다 발톱 칠하는데 더 신경 쓴다.
올여름 들어 처음으로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면서 난생처음 매니큐어를 바르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생이 된 후 꾸미기에 열중하던 시절. 신대륙에 발을 내디딘 콜럼버스의 마음으로 명동 한복판의 커다란 화장품 매장을 순례했다. 이제 막 ‘꾸밈’의 즐거움을 알게 된 새내기에게 그곳은 지상 낙원이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깔을 작은 유리병 안에 담아 모아 놓은 듯 총천연색 매니큐어가 빼곡히 채워진 진열대 앞. 그곳에 홀린 듯 새내기의 발이 멈췄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매니큐어는 립스틱과 함께 완벽한 어른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물건 중 하나였다. 그중 마음에 드는 색깔의 테스트용 매니큐어의 뚜껑을 열어 손톱 위에 조심스럽게 발라 봤다. 영롱한 반짝이가 가득 들어갔던 그 매니큐어를 바르면 내 손 위에 보석이 흩뿌려지는 느낌이 완성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고심 끝에 고른 색이었다.
어? 그런데 기대와 전혀 다른 결과였다. 매니큐어에 내장된 붓으로 꼼꼼히 발랐는데도 반짝이 조각은 손톱 위에 드문드문 몇 개 안 올라갔고, 손톱 위 색깔은 병 안의 색깔과 분명 달랐다. 다른 색도 몇 개 골라 발라 봤지만 별다르지 않았다. 원래 그런 건가 보다 하고 매니큐어에 대한 관심을 끊고 살았다.
그러다 친구 따라 처음으로 네일숍에 가서 전문가의 케어를 받고 나서야 알게 됐다. 매니큐어는 한 번 발라서 원하는 색깔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최소 2~3번 이상을 덧발라 줘야 본래의 색을 얻을 수 있다. 반짝이는 글리터가 들어간 제품이라면 더더욱 꼼꼼하게 여러 번 칠해야 빈틈없이 채워진다. 게다가 매니큐어만으로는 결코 유리알 같은 광채를 얻을 수 없다. 맨 마지막에 ‘탑 코트’라는 투명 매니큐어를 발라줘야 완벽한 마무리가 된다.
네일 전문가의 손길로 시시각각 변하는 내 손톱을 지켜보며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명동 화장품 가게에서 겨우 매니큐어 한 번 칠해 놓고, 광고나 잡지 화보 속 완벽한 손톱 상태를 기대했던 내가 어이없어서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한 번’을
그게 전부인 양
섣불리 판단하며 살아왔을까?
난생처음 한 번 먹어보고 입에 안 맞는다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던 포항 직송 과메기, 첫인상이 별로였던 소개팅남, 생애 최초로 3개월간 근력 운동을 했지만 근육량이 늘지 않아 기한 연장하지 않았던 피트니스 센터 등등 난 늘 ‘시도’에 의의를 뒀다. 이 구역의 소문난 쫄보였던 내가 먹어보기 전에, 만나 보기 전에, 해보기 전에 사전 차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 장족에 발전이었다. 하지만 ‘한 번’의 시도로 ‘꾸준함’이 쌓여야 얻는 결과를 손에 넣을 순 없었다.
물론 나에게 맞지 않는 걸 꾸역꾸역 하며 살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두 번 해 본 거로 그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해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지금 당장은 별로 같아도 때와 장소, 상황이 변하면 나에게 맞을 수도 있다. 한 번 발라서는 결코 본래의 색이 나타나지 않는 매니큐어처럼 삶에는 ‘반복’을 해야만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이 있다. 근력 운동이 그렇고,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하루아침에 근육은 생기지 않는다. 시간을 들여 꾸준히 반복해야 근육은 내 몸에 붙는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서 연락하고 만나고 마음을 나눠야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는다.
겨우 한두 번 경험한 것으로 그게 전부인 양 판단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당장 지금은 안 맞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의 취향이나 성격이 바뀌어 언젠가 맞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꾸준함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친해지는 과정이자 스며드는 단계란 걸 먼저 생각하기로 했다. 반복 운동을 통해 단단해지는 근육처럼, 자꾸 치대야 쫀득해지는 떡처럼. 자주 만나서 친해져야 진가를 알게 되는 사람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꾸준함은 일종의 재능이다. 그리고 어제 보다 오늘이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이보다 더 좋은 습관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