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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Nov 02. 2020

사람이 냉장고라면...

너 아닌 모르는 사람의 얘기라면, 미안하다 관심 없다


세상에는 크기도, 용도도 각기 다른 냉장고가 존재한다. 벽 한쪽을 다 차지하는 4 도어 최신식 냉장고도 있고, 총알도 뚫지 못할 만큼 두터운 문을 장착한 업소용 냉장고도 있다.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음료 전용 냉장고도 있고, 김치나 와인 등 특정 아이템만을 위한 냉장고도 있다.     

 

사람이 냉장고라면 난 어떤 냉장고일까? 아마 난 원룸용 냉장고 정도 아닐까? 허벅지 정도까지 올라오는 크기의 자그마한 그 냉장고 말이다. 손바닥 높이지만 냉동실까지 품었어도 문 하나로 커버가 가능한 냉장고. 달걀 몇 알, 캔 맥주 몇 개만 넣어도 빈틈이 없이 차 버리는 그 작은 냉장고. 조금만 수평이 안 맞아도 덜덜거리며 소음을 내는 게 딱 나다. 저장 공간도 좁고, 에너지 효율도 떨어지는 원룸용 냉장고. 새로운 하나를 넣으려면, 안에 들어 있는 두 개를 꺼내야 하는 게 꼭 오래된 소형 냉장고 같다. 생각의 깊이도, 마음의 넓이도 딱 원룸용 냉장고를 닮았다. 그런 내게 요즘 수용 범위를 넘어서는 정보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거 유행인데 몰라?

사람답게 살려면 이 정도는 알아야지?

너 정도라면 이거 이거는 해야지?

세상에나 요즘 이런 사람이 있다?

요즘 것들이랑 일하려면 이런 건 알아야지?

안락한 미래를 위해서 이 정도는 준비해 둬야지?     


몸에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씹기 좋고, 입에 착착 달라붙는 그 정보들. 친절하게도 검정 비닐봉지에 곱게 싸서 나라는 냉장고 앞에 차곡차곡 가져다 둔다. 난 그저 받아서 냉큼 넣기만 하면 되는데, 이미 문을 열어보면 냉장고 안은 꽉 차 있다. 이미 여러 내용물로 가득한 냉장고 안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상태다.       


편협한 세상에서 빠져나와 세상 돌아가는 것 좀 보라고. 시야 좁은 나라는 인간을 좀 사람답게 살게 하려고. 어수룩한 내가 걱정되니까. 결국은 다 나 잘되라고 건네는 정보들이 정작 내겐 버겁다. 손바닥만 한 내 그릇에 담기에는 차고 넘친다.


어차피 나 아닌 타인의 얘기라면 일면식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궁금하지 않다. 유명인의 스캔들, 사과문, 흑역사, 갭 투자 비결, 비운의 가정사, 감히 체감도 안 되는 수천억 자산가의 투자법 등을 안다고 해서 뭐가 좋은 건지? 왜 알아야 하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날아가는 자극적인 가십들로 대화를 채우고 돌아설 때면 헛헛함이 밀려들었다.      


난 그것보다 내 얼굴을 마주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당신들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 지금 당신들을 웃게 하고 또 울게 하는 건 뭔지? 당신들의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든 사건은 무엇이었는지? 최근에 가슴에 콕 박힌 관심사는 뭔지? 근래에 뭉클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어떤 노래를 들으면 다운된 기분이 올라오는지? 먹으면 힘이 나는 음식은 뭔지? 일주일 사이에 가장 크게 웃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이 가을이 다 가기 전, 단풍은 봤는지? 이번 시즌, 첫 붕어빵은 먹었는지?처럼 한없이 사소하지만, 당신들의 취향과 생각이 담긴 그런 이야기 말이다.      


똑같은 남의 얘기라도, 내가 얼굴을 마주하고 목소리를 듣고 표정을 읽을 수 있는 ‘내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나라는 냉장고 안에 차있는 유통기한 지난 것들을 꺼내 쓰레기통에 넣어 버릴 거다. 그렇게 생긴 빈자리에 ’ 내 사람들‘의 이야기를 채울 거다. 그건 남이 아닌 우리로 묶인 내가 응당 해야 할 일이다. 내가 말 한 번 섞어 보지 한 수천억 자산가의 추락을 받아 줘야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내 곁의 소중한 사람의 손에 박힌 가시는 내가 빼줘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세상만사에 넘치는 관심을 두는 자체가 그 사람의 취향이고, 생각이라면 존중한다.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그들의 기분에 굳이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기에 그저 조용히 듣는다.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일면식 없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대해 활활 불타오를 때면 슬쩍 입을 닫게 됐다. 그게 내가 택한 존중의 방법이다.     

 

이게 다 내 그릇이 작아서 생긴 문제라는 걸 안다. 아담한 원룸용 냉장고에 코끼리만 한 세상만사를 넣으려니 괴로웠던 거다. 사이즈만 봐도 이번 생에 난 뭐든 다 품을 수 있는 대인배가 되긴 글렀다. 그러니 나라는 자그마한 냉장고를 적당히 채우고, 또 종종 비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성능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부지런히 관리하면서 살 거다. 그래야 내용물이 뭔지 알 수도 없는 썩은 내 진동하는 검은 봉지 따위를 품고 살아가진 않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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