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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Dec 07. 2020

로봇이 아님을 증명하시오

기계적 증명 주의자의 고백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을 때, 머리가 얼음처럼 굳는다. 그야말로 급속 냉각. 이 냉기는 빛의 속도로 몸 구석구석 퍼진다. 생각의 근육은 물론 입 근육까지도 딱딱하게 만든다. 생각은 멈추고, 말문은 닫힌다. 얼마 전, 내 머릿속을 얼음 상태로 만드는 질문을 받았다.


온라인 쇼핑 중 가입을 하면 5천 원 할인 쿠폰을 준다는 이벤트를 보고 냉큼 회원 가입 버튼을 눌렀다. 약간의 귀찮음을 감수하면 5천 원 싼값에 물건을 가질 수 있다. 아이디를 고민할 필요도, 비밀번호를 조합할 필요도 없었다. 늘 쓰던 아이디와 비밀 번호가 있으니 빠르게 필요 항목을 채워 넣었다. 그때, 불쑥 뜬 새 창이 나를 막아섰다.  


뭐가 잘못된 걸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팝업창 내용을 천천히 읽었다. 길과 길이 아닌 사진들이 섞인 사진 중 ‘도로‘가 있는 이미지를 모두 선택하라는 내용이었다. 불필요한 기계적 회원가입을 막기 위한 장치. 지금 이 회원가입을 실행하는 자가 ’ 로봇‘이 아닌 ’ 사람’ 임을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절차다.      


여러 사진 속 도로 사진을 신중하게 골라 클릭한다. 다시 한번 눈으로 꼼꼼히 점검한 후 확인 버튼을 누른다. 확인 버튼의 색깔이 약간 흐릿해지며 내가 로봇인지 사람인지 판단을 한다. 채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불쑥 두려움이 차올랐다.        


사진 클릭 한 번 잘못해서
로봇이라는 결괏값이 나오면 어쩌지?
그럼 난 내가 로봇이 아닌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아침에 일어나 잠들 때까지 내가 하는 대부분의 일은 ‘증명‘이다. 나의 성실함을 증명하기 위해 찬 겨울바람을 뚫고 사무실로 향한다. 뭐든 귀찮아하는 모태 게으름과 싸우면서. 나의 값어치를 증명하기 위해 보고 들었던 걸 바탕으로 회의 때는 쉴 새 없이 떠들어 댄다. 세상일에 그다지 관심 없는 뼛속 깊이 밴 시니컬함과 싸우면서. 나의 존재감을 증명하기 위해 후배들에게 업무를 나눠주고 진행 상황을 체크한다. 연차가 쌓여도 여전히 내 일 하는 것도 벅차다는 자괴감과 싸우면서. 나의 경제력을 증명하기 위해 지갑을 열어 카드를 긁는다. 언제 얄팍한 통장이 언제 바닥을 보일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싸우면서. 나의 사람됨을 증명하기 위해 아량이 넓은 척 ‘괜찮아요 ‘라고 대답한다. ’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의 불편함과 싸우면서. 염치없는 딸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주중에는 세탁기를 돌리고, 주말이면 몇 끼니를 책임진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개인주의와 싸우면서. 나의 존버력을 증명하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 브런치에 글을 올린다. 지독한 ’ 내 글 구려병‘과 싸우면서. 나의 꾸준함을 증명하기 위해 아무리 피곤해도 잠들기 전 무조건 책 한 챕터는 다 읽고 나서야 잠자리에 든다. 1만 톤짜리 무쇠 추를 단 듯 내려앉는 눈꺼풀과 싸우면서.      


요즘, 그야말로 '로봇'처럼 살고 있다. 이 로봇의 임무는 ‘증명’. 나를, 그리고 내 능력을 증명을 위해 기계처럼 산다. 목표를 주면 문제 해결을 위한 최선의 결괏값을 얻기 위해 머릿속 회로를 돌린다. 감정 따위는 저 멀리 밀어 두고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계산적으로 산다. 투입한 노력과 시간에 최대의 효율을 얻을 수 있는 성과를 얻기 위해 딱딱해진 머리를 쥐어 짜내고 있다.      


로봇으로 살고 있는데 로봇이 아님을 증명하라는 미션(?)을 받으니 그제야 사람의 정신이 들었다.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살았던 날들을 천천히 돌아봤다. 연말이라서 그럴까? 뭔가 결과를 손에 쥐고 싶다는 조급함이 가득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번듯한 성과를 얻겠다는 욕심이 스멀스멀 나를 채우고 있었다. ‘인정의 욕구‘라는 늪에 또 빠지고 말았다. 결과로 얻을 잠깐의 기쁨을 위해 일상 속에서 느끼고 누려야 할 사소한 행복들을 기계처럼 쳐내고 있었다. 그게 뭐라고, 결과가 뭐라고. 순간의 즐거움을 아껴둔다고 돈처럼 이자가 붙는 것도 아니고, 찰나의 기쁨을 묵혀 둔다고 와인처럼 숙성되는 것도 아닌데... 로봇처럼, 기계처럼 입력값에 따라 수행하고 결괏값을 얻기 위한 전력 질주는 이제 멈추기로 했다.        


내일 아침 출근길에는 기계적으로 주문하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말고 다른 걸 마셔야겠다. 날씨가 따뜻해진다면 달달한 캐러멜 마까아또를, 기분이 텁텁하다면 상큼한 텐져린 라테를, 마음의 온기가 필요하다면 진저 애플 티를 마셔야지. 성공과 실패 단 두 가지의 색깔만 있는 ‘로봇’ 말고 총천연색 감정과 기분을 채운 ‘사람‘으로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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