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증에 걸렸습니다
징징 대신 입금이 약
하기 싫어. 하기 싫어. 마스크 바깥으로 새어 나갈까 낮은 목소리로 되뇐다. 마음이 가까운 사람과 눈을 마주치면 습관적으로 징징거린다.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다. 아무 소음 없는 조용한 곳에서 돌멩이처럼 웅크리고 있고만 싶다. ‘싫어증‘이라는 이름의 오랜 고질병이 도졌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 가출하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는다.
불쑥불쑥 깜빡이도 켜지 않고 머리를 들이미는 돌발 상황. 한겨울 호떡 뒤집듯 확확 뒤집히는 변수. 안갯속을 허우적거리듯 앞이 보이지 않는 모호함. 치우고 돌아서면 무섭게 쌓이는 폭설처럼 쏟아지는 일의 기세에 압사당하기 직전이다. A를 마무리하기도 전에 B, C, D가 자기를 좀 어떻게 해 달라고 아우성친다. 도망치기 1급 자격증 보유자의 마음속에는 ‘하기 싫음‘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이 세상에 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 새로운 일, 벅찬 일, 복잡한 일, 껄끄러운 일, 여러 사람과 끊임없이 복닥거리는 일, 에너지 빼앗기는 일, 시간에 쫓기는 일, 지루한 일 등등 일이란 일은 다 싫어하는 타입이 바로 나다. 하지만 일을 안 하고 살 순 없으니 ‘닥치고‘ 하고는 있지만 아! 정말 하기 싫다.
생각해 보면 미룬다고 사라지지도 않고, 넘긴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 어찌해야 괴로움에 몸부림치지 않고 할 수 있을까? 며칠 고민을 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온라인 현자의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그는 화나고 짜증 나는 상황이 생길 때마다 1818원, 181818원처럼 18로 된 숫자의 금액을 ‘욕 통장’으로 이체한다고 했다. 이 얼마나 창의적이고 건설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인가?
나와 약속했다. ‘하기 싫어’라는 마음이 들 때, 무의식 중에라도 ‘하기 싫어’라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 칼같이 ‘싫어금’을 입금하기로. 금액은 5천 원. 향 좋은 산미 없는 커피 한 잔 값이다. 카페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이 시국. 커피를 마시면서 바닥나버린 버린 의지와 에너지를 채웠다고 생각하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돈이다.
사회생활 1N 년을 했어도 여전히 일은 어렵고, 인간관계는 서툴다. 쌓인 거라고는 이런 인생의 잔기술. 내 성향을 어제보다 오늘 더 알게 되고, 그에 맞는 당근과 채찍을 준비하는 센스가 생겼다. 20대 때였다면 ‘못났다’며 다그치고, 자괴감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나라는 인간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하기 싫음을 유발하는 존재들을 끌어안고 끙끙거리기보다 언젠가 쌓여 있을 ‘싫어금’으로 뭘 할지?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에베레스트산 같은 업무의 산을 넘어갈 거다.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는 이달 말까지 난 얼마의 ‘싫어금‘을 모으게 될까? 그 싫어금은 자라서 뭐가 될까? 코로나 시국이 잠잠해진다면 제주도 비행기 티켓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슬슬 바닥을 보이는 향수와 배턴 터치할 새 향수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오래 고생한 할매 노트북을 대신할 새 노트북을 살 종자금이 될까? 싫어금의 찬란한(?) 미래를 생각하면 매일매일 하기 싫은 마음이 차오르길 바라야겠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일. 돈이 안 쌓이면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았다는 증거여서 좋다. 또 돈이 많이 쌓이면 새해에 원하고 바라는 걸 가질 수 있어서 좋다. 결과가 어떻든 좋은 거다. 앞으로 약 20일. 하기 싫은 마음을 살살 달래 가며 싫어금 통장의 ‘어쨌든 해피엔딩’을 기다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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