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파도처럼 밀려오고 또 때로는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들
저녁을 먹은 후 설거지를 하던 중이었다. 싱크대 주위를 걸레질하던 엄마가 화들짝 놀라 말했다.
“어머 얘! 너 발톱이 왜 이래? 곧 빠질 거 같아. 안 아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얼른 발톱을 살폈다. 오른쪽 새끼발톱이 꼭 매니큐어를 칠한 것처럼 보라색이었다. 근래에 발을 밟혔다거나 무거운 것에 눌린 기억이 없다. 무리해서 걷거나 등산을 간 지도 오래됐다. 그렇다고 딱히 딱딱한 구두나 힐을 신은 날도 많지 않았다.
가끔 멍이 든다.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는 보라색 멍들을 종종 팔, 다리에서 확인했었다. 하지만 발톱이 이렇게 진보라색이 된 적은 처음이었다. 엄마의 말대로 조만간 빠지겠구나 싶었다. 보라색이 된 오른쪽 새끼발톱. 그저 수명이 다해 간다는 신호라고만 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오른쪽 새끼발톱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정확히 3일 후. 발톱이 빠졌다. 빠질 거라 예상했던 오른쪽이 아닌 왼쪽 발톱이. 자려고 이불에 발을 넣는 순간 덜컥하고 뭐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불을 들쳐 그 ‘불편함‘의 원인을 찾아보니 왼쪽 새끼발톱이었다. 0.1mm만 붙어 있고 거의 떨어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 그 안에는 이미 발톱이 올라오고 있었다. 연한 핑크빛의 새 발톱이. 덜렁덜렁 겨우 붙어 있는 왼쪽 새끼발톱은 온몸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이제 그만 날 놔줘! 제발”
이 당황스러운 전개는 뭐지? 발톱이 빠질까 봐 유심히 챙겼던 오른쪽 새끼발톱은 멀쩡한데, 생뚱맞게 왼쪽 발톱이 빠졌다. 통증이나 불편함? 뭐 이렇다 할 전조 증상도 없었다. 그러니 더 어이가 없었다. 얼떨떨함을 털어내고 손톱깎이를 꺼내 겨우 발가락과 발톱을 이어주던 0.1mm의 살점(?)을 끊어냈다. 피가 나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질긴 생에서 비로소 해방된 새끼발톱을 휴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넣으며 생각했다.
뭐가 언제 떠날지 모른다.
알 수 없다.
기약도 없이. 예고도 없이.
뭐든 사라질 수 있다.
당연히 곧 떠날 거라 생각했던 오른쪽 새끼발톱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하루하루 서서히 보라색 멍이 옅어지면서. 건강한 혈색으로 돌아오고 오고 중이다. 반면 떠날 거라 생각지도 못한 왼쪽 새끼발톱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 발톱이 자라고 있다.
의심 없이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가 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젊음이, 자신했던 건강이, 내 편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그랬다. 반면, 영원히 내게는 오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깜빡이도 켜지 않고 불쑥 내 인생에 끼어들 때가 있다. 예상치 못한 기회가 , 집순이에게 마냥 귀찮은 일이었던 여행이 그랬다. 그저 쓰기만 해서 내 취향이 아니라고 했던 아메리카노도 그랬다. 정반대의 성향 때문에 영원히 친해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이제는 영혼의 단짝이 된 사람도 그랬다. 그렇게 때로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기도 하고, 때로는 파도처럼 밀려오기도 한다.
무언가 사라진 자리에는 뭐든 새로 채워진다. 무언가 채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빈자리가 생겨야 한다. 텅 빈 그 자리를 보고서야 의식하지도 못한 채 오래 그 자리에 있던 것들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미련이 지나간 자리에는 후회가 남는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다짐한다. 있을 때 잘하기로. 언제든 사라질 수 있으니 한 톨의 아쉬움도 남지 않게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보라색 멍이 빠진 오른쪽 새끼발톱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오래된 발톱이 빠진 왼쪽 새끼발가락은 새로 올라오는 발톱이 하루하루 단단해지고 있다.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 갑갑한 부츠나 운동화를 벗고 샌들을 신게 되는 계절이 오면 분명 건강한 발톱이 세상 빛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뜨거운 햇빛 아래 단단해진 발톱처럼 몸도 마음도 튼튼해진 나도 서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