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숙이 말고 미숙이에 대하여
초등학교 2학년 첫날, 새 짝꿍이 생겼다. 이름은 미숙이. 교탁 앞 맨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으니 콩알만 한 한 키는 고만고만했다. 하지만 미숙이와 난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달랐다. 밀가루 반죽처럼 하얀 얼굴에 빨간 리본으로 야무지게 묶은 양 갈래 머리와 까만 벨벳 원피스까지... 내가 진흙탕에서 뒹군 꼬질한 시골 동네 강아지 같았다면 미숙이는 부잣집 고양이처럼 새침하고 도도했다. 분명 같은 나이, 같은 자리에 나란히 앉았지만, 벽이 느껴졌다.
중학교 1학년. 큼지막한 교복을 어색하게 입은 채 내 인생의 두 번째 미숙이를 만났다. 바로 뒷자리에 앉은 미숙이는 역시나 하얀 얼굴에 진한 쌍꺼풀 있는 커다란 눈을 가진 친구였다. 부반장인 미숙이는 쾌활하고 똑 부러지는 친구였다. 입담 좋고 활달한 성격의 미숙이는 늘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그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친구 중 하나였다.
많은 사람은 ‘미숙’하면, 일 따위에 익숙하지 못하여 서투름을 뜻하는 미숙(未熟)을 생각한다. 두 친구의 영향 때문인지 내게 미숙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브랜드처럼 느껴진다. 고고하거나 쾌활하거나. 도도하거나 당차거나. 내가 가지고 싶은 이미지를 가진 일종의 이상향에 가까운 존재였다. 처음 만난 사람이 자기 이름을 ‘미숙’이라고 소개하면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 만났던 두 미숙이가 떠오른다. 도도한 미숙이일까? 친화력 좋은 미숙이일까? 조심스럽게 어릴 적 두 친구가 자라 ‘오늘의 미숙이‘가 되지 않았을까 상상을 해 본다.
새 학년에 올라가고, 상급 학교에 진학하면서 두 친구와 자연스레 연락은 끊겼다. 하지만 난 여전히 미숙이와 함께 하고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내 곁에는 늘 미숙이가 있다. 내 안의 무수한 미숙(未熟)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동경의 대상이었던 두 미숙이와 달리 내 안의 미숙이는 늘 날 괴롭힌다.
낯가림을 뛰어넘어 처음 보는 사람과 말 섞는데 미숙하고, 셈 따지기에 미숙하다. 여러 사람 앞에서 조리 있게 말하는 일에 미숙하고, 날 선 공격 앞에 표정 관리하는데 미숙하다. 속마음을 말로 표현하는데 미숙하고, 논리적으로 화내는 일에 미숙하다. 쓴소리를 받아들이는데 미숙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는 일에 미숙하다. 날음식을 먹는데 미숙하고, 돌발 상황 앞에 평정심을 유지하는 일에 미숙하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일에 미숙하고, 갑이 되는 상황에 미숙하다. 이렇게 내 안의 미숙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괴롭힌다.
내 안에는 능숙이 보다는 미숙이의 지분이 많다. 내 안의 미숙이들이 현실의 문을 벌컥 열고 튀어나올 때 난 바람 빠진 풍선처럼 볼품없이 쪼그라든다. 그 꼴이 보기 싫어 내가 미워진다. 마흔이 넘으면 바위처럼 굳건하고, 단단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바위는 개뿔! 돌멩이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여전히 난 순두부 멘털에 유리 심장을 가진 ‘미숙이’ 일뿐이다. 능숙이로 진화하지 못한 미숙이를 만날 때마다 어릴 적 두 친구, 미숙이를 떠올려 본다. 고고한 미숙이었다면? 아님 당찬 미숙이었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곤 했다.
사실, 죽었다 깨어나도 난 두 미숙이가 될 수 없다. 태생이 허술한 구멍 천지고, 숨 쉬듯 눈치 보는 게 일상이니 도도한 미숙이도, 야무진 미숙이도 내 캐릭터는 아니다. 내 안의 많은 미숙이들을 능숙이로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미숙이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어르고 달래서 함께 데리고 사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평생 갈 친구니까. 난 미숙이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니까. 아마 난 내 안의 미숙이들이 현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때면 반갑게 맞아 주지는 못할 거다. 영원히. 하지만 ‘어! 그래 너 올 줄 알았어’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면 당황 수치가 100%에서 60% 정도로는 떨어질 거다.
미숙이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대신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기로 했다. 미숙이들을 몰아내려 애쓰기보다 언제든 미숙이들이 들어오고 나갈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한 뼘쯤 열어 놓으며 살기로 했다. 그러면 성난 얼굴의 미숙이들이 꼭꼭 닫아 놓은 문을 벌컥 열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더 떨지 않을 테니. 미숙이들을 향해 마음의 문을 한 뼘쯤 열어 놓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 이때야말로 내가 무른 미숙이에서 단단한 능숙이에게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는 시작점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