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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an 26. 2021

당신의 다이어리는 안녕하십니까?

좀 이른 다이어리 중간(?) 점검



2021년 새해가 시작된 후 첫 월요일. 지난 연말 내내 커피 17잔을 마시고 맞바꾼 초록색 별다방 다이어리를 펼쳤다. 지난번, 연말이 되면 매해 연례행사처럼 다이어리를 모으기만 했지 정작 사용하지 않았다는 글을 쓰고 난 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의 말대로 뭔가를 모으기만 하는 걸 열심히 한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몇 년째 책장 틈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다이어리를 더는 방치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2021년 다이어리만큼은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쓸쓸히 퇴물이 되는 슬픔을 겪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쓰기로 마음먹었다. 다이어리로 태어난 보람을 느끼게 해 주리라 작심했다. 크다면 크고, 사소하다면 사소한 결심을 마음에 품고 다이어리를 펼쳤다. 그리고 맨 앞장에 2021년 한 해 동안 이루고 싶은 구체적이고 자잘한 목표들을 또박또박 적었다.     


책 ○○○권 읽기
잠들기 전 책 한 쳅터씩 꼭 읽기
하루에 ○○○○○보 걷기
몸무게 ○○kg 유지하기
비행기 ○번 이상 타기
글씨 교정 책 ○번 반복해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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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다이어리 꼬박꼬박 쓰기      


방학 때면 숙제로 일기를 썼다. 왜 써야 하는지도 모르고 쓰라니까 썼다. 그 시절, 많은 초등학생이 그런 것처럼 나 역시 개학 며칠 전 벼락치기로 한꺼번에 몰아 일기를 썼다. <오늘은  △△△을 했다. 참 재미있었다> 혹은 <오늘은 ★★★을 먹었다. 참 맛있었다> 정도로 복사 수준의 일기를 손으로 찍어냈다. 차라리 산수 문제를 풀라고 하지 왜 일기를 숙제로 내줄까? 선생님을 원망하며 팔이 빠져라 일기를 썼다. 그렇게 ‘일기‘라는 단어는 나에게 ’ 귀찮음‘, ’ 하기 싫음‘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겹겹이 쌓여갔다.


무언가 꾸준히 기록하는 일에 재능이 없는 나는 종종 놀라곤 한다. 사춘기 때부터 써온 다이어리가 집에 수 십 권 쌓여 있다는 지인. 일, 일상, 덕질 등 필요에 따라 한 번에 여러 개의 다이어리를 쓴다는 친구. 다이어리 꾸미기, 일명 ‘다꾸’에 빠져 매달 몇만 원씩 각종 물품(?)을 산다는 후배 등등 다이어리(쓰기)에 진심인 사람이 이토록 많은지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관심 없어 몰랐던 ‘다이어리의 세계’는 실로 다양하고 또 깊었다.


2021년을 시작한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겨우 한 달을 못 채운 ‘다이어리 꿈나무‘의 행보를 중간 점검하자면 80점 정도? 이토록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는 이유는 일기를 향한 허들을 낮췄기 때문이다. 난 나를 안다. 매일 꾸준히 하지 않을걸. 그걸 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처음 다이어리를 써야겠다 마음먹을 때도 굳이 ’ 매일‘이란 단어를 집어넣진 않았다. 이게 바로 ’ 게으름의 달인‘이 꾸준히 다이어리를 쓰게 만든 꼼수. 잘하기보다 우선 꾸준히 해서 바라는 바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초반에 힘 다 빼고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보다는 우선 무사히 끝내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이어리에 하나 둘 이가 빠지더라도 '망했다'라고 단념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앞으로의 날들의 빈칸에 한 줄이라도 채워 넣는 습관을 들이기로 했다. 다이어리를 펼치는 일이 귀찮아질 때마다 이 말을 곱씹는다. Done is better than perfect. 성급하게 결과를 속단하지 말고, 우선 시작한다. 그리고 끝을 맺을 것. 이게 바로 올해의 모토다. 이것이 바로 2020년의 나를 일으킬 말이다.

  

보통 일주일에 1~2번 몰아 다이어리를 쓴다. 주로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그 책의 이름을 기록하기 위해 다이어리의 월간 페이지를 펼친다. 그리고 이어 일간 페이지에 본격적으로 일기를 쓴다. 그날 있었던 특징적인 일과 그때의 감정, 그리고 마무리는 늘 그날의 나를 칭찬하는 한마디로 끝낸다. 길지도 않고, 별 심오한 내용도 없다. 어떤 싹을 틔울까? 어떤 색깔의 꽃을 피울까? 어떤 모양의 열매를 맺을까? 기대하는 농부의 심정으로 캄캄한 땅에 씨를 뿌리듯 다이어리에 감정과 글자들을 뿌려 놓는다.      


2021년의 마지막 날, 다이어리 맨 앞장의 To Do List는 몇 개나 클리어하게 될까? 이 무심한 시간과 글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올해의 끝에 선 내게 어떤 의미를 선물할까? 검사를 하는 선생님도 없고 ‘좋아요’를 눌러주는 독자도 없는 글, 일기. 2021년의 나를 오롯이 담을 이 초록 다이어리의 미래가 궁금하다. 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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