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변잡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Jan 29. 2021

눈이 말하는 것들

마음을 읽어 주세요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어느 배우의 놀라운 능력이라며 추천 동영상이 하나 떴다. 동영상이 끝날 때 내 얼굴엔 눈물이 흥건했다. 이 모든 일은 27년 연기 경력의 베테랑 배우를 인터뷰하던 MC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배우들의 눈물 연기 노하우를 묻는 질문에 배우는 질문자의 눈물을 끌어내 보겠다고 했다. 자신만만한 배우는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제 눈만 보고 집중해 주세요. 제가 뭐라고 하는지 마음을 읽어 주세요.”     


한참 동안 서로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두 사람. 늘 밝기만 했던 MC의 얼굴이 서서히 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서서히 밀려든 먹구름이 이내 소나기를 쏟아지는 것처럼 이내 눈물을 흘렸다. 갑작스레 쏟아진 눈물에 순식간 촬영장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자신도 예상치 못한 눈물에 멋쩍었던지 MC는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배우님께서 눈빛으로 저를 어루만져 주셨어요.”     


이 내용이 공개된 후 반응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난리가. 단시간 내에 눈물 쏟기. 예능의 뻔한 클리셰라고만 생각했다. 일종의 스포츠 같은. 눈을 깜빡이지 않거나, 눈을 찌르거나 같은 물리적 행동을 통해 눈물을 끌어내는 업계의 기술(?)을 슬쩍 보여주나 싶었다. 내 오만한 편견은 와장창 깨졌다. 처음에는 MC의 얼굴에 집중했던 포커스가 이내 건너편 배우의 얼굴로 옮겨졌다. MC가 시선을 집중했던 배우가 눈빛으로 위로를 건네던 순간을 천천히 보여줬다. 배우는 대단한 손기술이나, 화려한 말재주 없이 그저 눈빛만으로 상대방의 눈물을 끌어냈다. 넘치는 정보와 지리멸렬한 소음 가득한 세상에서 눈빛이 건네는 ‘조용한 위로‘가 사람을 무장해제시키고 말았다.


사람의 눈은 대체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어릴 적, 잘못을 한 내게 엄마는 말했다. “엄마 눈 똑바로 쳐다봐. 엄마는 눈만 봐도 알 수 있어. 네가 지금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 그때는 몰랐다. 내가 말을 안 하는데 눈만 보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궁금했다. 영악과 거리가 멀었던 난 엄마와의 눈싸움에서 나는 늘 패자였다. 엄마가 빗자루를 들기도 전에 죄를 고하는 신속함으로 살아남았다. 10대 맞을 죄를 3대 맞았다는 기쁨 속에서도 물음표가 차올랐다.      


어떻게 눈만 보고 알 수 있는 거지?      

딸의 눈빛만 보고도 잘못을 가늠하던 엄마.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어느새 내게도 보였다. 눈동자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눈이 하는 말이 들렸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수많은 단어를 쏟아내지 않아도 눈빛이 던지는 말이 때론 더 강력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이제는 옷차림이나 말투, 사용하는 단어, 걸음걸이, 앉은 자세 등 겉으로 드러나는 정보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눈빛의 온도와 강도, 눈동자의 맑음 혹은 흐린 정도까지 세세하게 보곤 한다.       


정신이 맑지 않은 사람의 눈은 늘 흐릿하다. 거리에서 만나는 종교를 전도하는 사람들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선명하지 않은 그들의 눈빛에서 불확실한 그들의 의도를 느끼곤 한다. 번드르르하게 차려 입고 달콤한 말을 쏟아내는 정치인들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기름 낀 눈빛에서 불손한 목적이 느껴진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속이려는 사기꾼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서늘한 뱀의 눈빛에서 비릿한 의지를 느낀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한 후 거울을 한참 들여다본다. 피부의 탄력이 떨어져 푸석하다. 기미도 하나 둘 올라오고, 눈가의 주름도 생기는 나이. 그 역력한 노화의 증거들보다 사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다. 바로 눈빛. 작은 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눈빛이 어떤지 체크해 본다. 흐리멍덩하진 않은지, 군더더기가 덕지덕지 붙은 건 아닌지, 불필요하게 분주한 건 아닌지. 눈빛의 온도와 강도 그리고 움직임까지 천천히 살핀다. 내 눈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왜곡 없이 전하고 있을까? 내 눈이 하는 말은 내가 원하는 과녁에 제대로 꽂힐까? 잠을 털어낸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수다쟁이처럼 질문을 던진다.      


노안이 와서 시력이 떨어져도 눈의 총기는 잃고 싶지 않다. 나이를 먹어 체력이 떨어져도 눈의 반짝임은 잃고 싶지 않다. 기력이 떨어져도 눈의 생기를 잃고 싶지 않다. 언제든, 누구에게든 눈빛으로 조용한 위로와 따뜻한 응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흐릿해지는 정신과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선명하게 살자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