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기쁨
폭발 직전의 나와 상황 진화에 나선 선배가 마주한 시간. 어찌어찌 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 선배가 말했다.
너 그거 알아?
네가 생각한 대로 일이 안 풀리면
펜으로 탁탁 두 번 테이블을 치는 버릇이 있는 거?
전혀 생각도 못 한 얘기였다. CCTV 카메라가 되어 회의하던 그날들로 시간을 되감아 봤다. 무거운 분위기에 날 선 말이 오가던 그 상황에 얼굴 가득 먹구름이 낀 나. 회의 페이퍼를 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다. 커피를 들이켜며 골똘히 생각한다. 그리고 펜의 촉을 테이블에 톡톡 두드리고 머릿속에 품었던 말을 내뱉는다. 그래 분명 선배가 말한 그 행동을 내가 하고 있었다. 의식하지 못한 내 버릇을 알려준 선배는 말을 덧붙였다. 예리한 바늘처럼 따끔한 한마디를.
네가 펜 톡톡 두드릴 때마다 다들 너 눈치 본다고.
그 펜 소리가 얼마나 분위기 싸하게 만드는데.
그 버릇 고쳐야 해.
의식하지 못한 내 버릇을 발견해 준 선배. 그의 말에 한동안 뒤통수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 의도도 없고, 누가 내 사소한 행동을 신경 쓰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더군다나 그 행동이 튀어나올 때 다들 내 눈치를 보고 있을 거라 상상도 못 했다. 이 자리를 통해 변명하자면 내 그 행동은 머릿속 생각을 정리한 후 아이디어를 밖으로 내보내며 세상의 문을 두드리는 일종의 ‘노크‘다. 생각을 부팅하는 내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문제가 일어났다는 이상 신호처럼 받아들여졌다는 걸 선배의 직언을 통해 알게 됐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A는 상대를 이해시킬 때, ‘상황적으로’라는 말을 버릇처럼 쓴다. B가 크건 작건 끊임없이 카드를 긁는다는 건 스트레스가 최고치에 도달했을 때 나오는 버릇이다. 내 책에 ‘뭐를 먹던 옷에 흔적을 남기는 C‘에 대해 쓴 이후 그는 같이 식사를 하며 뭔가를 흘릴 때마다 버릇처럼 나와 눈이 마주친다. D는 상대방을 칭찬할 때면 본인을 하염없이 낮추는 방법을 버릇처럼 쓴다. E가 자르기, 붙이기 같은 단순 노동에 몰입한다는 건 심리적으로 불안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F는 뭔가 생각할 때 버릇처럼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관자놀이에 꽂으며 집중한다. G는 흘러내린 안경을 올릴 때 버릇이 손목을 한 바퀴 반 돌려 우아하게 안경을 원하는 위치에 고정시킨다. 둘러보면 정작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버릇을 타인들은 귀신같이 알아채곤 한다.
의도가 어떻건 다수의 사람이 불편하게 느낀다면 그 습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선배의 말을 듣고, 의식적으로 여럿이 모이는 회의 때는 딱딱한 펜을 멀리하게 됐다. 부딪히면 딱딱 소리 내는 펜 말고, 고무가 달린 연필을 손에 쥐었다. 이게 내가 찾은 방법이다. 하루아침에 버릇이 바뀌진 않을 테니 두드릴 때 두드리더라도 불필요한 소음을 덜 내는 필기구를 찾은 거다. 가벼운 연필을 쥐고, 바닥을 톡톡 두드리고 싶을 때면 머릿속에 선배의 그 말을 떠올린다. 언젠가 이 나쁜 버릇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 의식적 행동은 계속될 거다.
NN년을 살았지만 난 여전히 나를 모른다. 나도 모르는 내 버릇을 발견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내 나쁜 버릇. 나이를 더 먹어 몸도 마음도 딱딱해져 ‘그까짓 게 뭐 대수라고’라며 무시해버리는 사람이 되기 전에 알게 됐으니 말이다. 아직 몸도 마음도 말랑하니 잘못된 건 고치고, 좋은 버릇을 들일 수 있는 여유가 아직 내겐 많이 남아 있다. 앞으로 나는 또 어떤 나를 발견하게 될까? 내게 남은 날들엔 나를 발견하는 기쁨이 알알이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니 불투명한 내일이 마냥 두렵지만은 않다. 아니 더 기대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