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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Nov 24. 2021

내 인생의 첫 사수, M언니께

일 잘하는 사람의 기준


참 오랜만이죠? 우리가 못 본 지 강산이 두 번 넘게 바뀔 만큼 시간이 흘렀으니까. 낯선 이름의 등장에 당황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언니가 잘 지내고 계신다면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이렇게 언니께 편지를 쓰게 된 이유... 궁금하시죠? 사실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아요. 얼마 전부터 더 늦기 전에 마음을 전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편지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어요.  이 엉뚱한 생각에서 출발해 편지를 쓰기 시작했요. 이 편지가 당사자들에게 닿을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써보기로 했어요. 요즘 제 인생 모드가 이거 거든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일단 시작 하자.      


첫 편지는 누구에게 보낼까? 며칠 고심을 하다가 문득 언니 이름이 떠올랐어요. 아마 우리가 처음 만난 게 딱 이 맘 때여서겠죠.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때의 일이네요. 사실, 그때 저는 어른들의 세뇌 덕에 대학에만 들어가면 뭐든 다 이뤄질 줄 알았던 똥멍충이였어요. TV 드라마 속 주인공들 같은 캠퍼스 라이프를 상상하며 붕 뜬 마음으로 시작했던 대학 1학년 1학기는 맹탕, 그 자체였죠. 차가운 현실을 서서히 알게 된 2학기 중간고사까지 끝낸 즈음... ‘어른들은 다 거짓말쟁이야‘라는 비뚤어진 마음을 품은 채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였어요. 선배나 동기들과 시끌벅적하게 어울리는 것도, 끝이란 게 없는 술자리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자발적 아싸' 새내기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오는 게 전부죠. 집에서 밤낮으로 티브이나 라디오만 끼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아까웠어요.      


언니와 만나게 될 운명이었을까요? 마침, 그때 그게 눈에 들어왔어요. 집에서 멀지 않은 번화가 액세서리 가게 유리벽에 붙은 아르바이트 공고 말이죠. 판매 알바를 해본 적도 없으니 잔뜩 긴장한 채 쭈뼛쭈뼛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곳에 언니가 있었어요. 번쩍이는 귀금속부터 꼬꼬마를 위한 알록달록한 머리핀까지 다양한 액세서리를 팔던 작은 가게. 언니는 아마 지금으로 치면 매니저쯤 됐겠죠? 여러 알바생이 들고 나던 그 자리에 제가 새로 들어왔죠. 평일에는 하교 후 저녁 6시부터 밤 10시까지. 주말에는 오전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을 하기 시작했죠. 갓 태어난 고라니처럼 어리바리한 초보 알바를 보면서 언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편지를 쓰다 보니 문득 궁금하네요.  

    

우리가 몸담은 그곳은 놀기 좋아하는 부잣집 사모님을 위한 일종의 부업 현장이었죠. 수익보다는 사장이라는 타이틀과 알리바이를 위해 마련한 그곳에서 언니는 사장 언니의 총애를 받는 존재였잖아요. 사장님은 전적으로 언니를 믿었고, 마감할 때만 잠깐 얼굴을 비출 정도였죠. 시제가 맞는지 확인 후 그날의 매출만 쏙 챙겨 갔으니까요.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처럼 늘 분주하지만 절도 있게 움직였던 언니. 본사에 주문 넣기부터 청소, 손님 응대, 디스플레이, 알바생 관리, 간단한 수리, 하다못해 해질 무렵 간판에 불 켜는 일까지 등 매장의 모든 일에는 언니의 손이 안 닿는 곳이 없었죠. 인수인계도 전 알바생이 아닌 언니가 해줄 정도였으니까.    

  

수년째 그 매장의 유일한 정직원인 언니는 눈 감고도 모든 일을 척척 했죠. 알바는 물론 사회생활 경험이 전무한 제게 그런 언니가 얼마나 크게 보였는지 모르실 거예요.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도 개미 목소리보다 작게 겨우 내뱉던 제게 언니는 가히 신이었어요. 경찰처럼 손버릇 나쁜 어린이를 귀신같이 잡아내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 쇼핑 호스트처럼 구매를 망설이는 손님께 확신에 찬 목소리로 판매를 유도하는 모습, 피아니스트처럼 경쾌하게 계산기를 두드리며 시제를 맞추는 모습 등등 제가 사장이었어도 언니를 전적으로 믿고 맡길 수밖에요.     

 

그래서 언니의 휴무일이 오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라요. 존재감이 차고 넘치는 언니가 없는 날이니까. 귀금속을 취급하는 매장의 특성상 혼자 매장에 있는 일은 없잖아요. 저 말고 누군가 한 명이 매장에 있어야 하는데 언니가 없으면 나올 사람은? 사장 언니뿐.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사장님과 단 둘이 그 좁은 공간에 있는 건 숨 쉬는 것조차 불편한 일이잖아요. 손님 없을 때는 앉아서 쉬라고 하셨지만 괜히 눈치가 보여 먼지 하나 없는 매대를 닳고 닳도록 닦았어요. 나중에 시간이 흘러 사장 언니랑 친해져도 둘이서만 있는 건 끝까지 불편했어요.      


액세서리 가게의 최대 성수기, 크리스마스 시즌 때였을 거예요. 저는 태어나서 처음 알았어요. 이 세상의 사랑꾼은 모두 우리 가게로 온다는 걸. 그토록 좋아했던 캐럴도 두 달 내내 반복해 들으면 귀에서 피가 날 수 있다는 걸. 물건을 사겠다는 사람으로 가게가 미여 터질 수도 있다는 걸. 사람이 12시간 내내 의자에 한 번도 앉지 않고, 밥도 먹지 않아도 물건만 잘 팔리면 힘이 난다는 걸. 평균 매출이 몇십만 원 안 됐던 그 손바닥만 한 가게도 크리스마스 때는 수백의 매출을 찍는다는 걸. 그야말로 어메이징 크리스마스였죠. 그 기간 기대 이상의 매출을 올린 게 기뻤는지 며칠 지나지 않아 사장님은 언니께 큰 쇼핑백을 하나 건넸죠. 그 안에는 초록색, 즉 크리스마스트리 색깔의 페이크 퍼 코트가 들어 있었잖아요. 저는 속으로 세상에 벌칙 의상인가?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이 이렇게 화려한 걸 어떻게 입지? 사장님의 취향인가? 했어요.      

 

근데 알고 보니 언니 취향이었더라고요. 옆 옆 옷가게 쇼윈도에 걸린 옷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언니를 기억한 사장님의 선물이었죠. 곧 있을 언니 생일 겸 크리스마스 시즌을 잘 마무리했다는 보너스 개념이었겠죠 아마? 예상치 못 한 선물에 서둘러 그 코트를 입는 언니의 싱글벙글한 얼굴이 아직도 생생해요. 솔직히 제 눈엔 영락없는 ‘인간 크리스마스트리’였지만 언니가 좋으면 그걸로 된 거죠.   

    

그날 코트를 받아 들고 꽃처럼 활짝 핀 언니의 얼굴을 보며 다짐했어요. 나도 열심히 일해서 보너스 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일 잘한다는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지.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는 알아준다는 믿음이 생겼어요. 그날부터 제게 언니는 교과서가 됐죠. 언니의 모습을 하나하나 따라 하며 일의 스킬이 늘었죠. 그 전까지만 해도 시키는 일을 해내는데 급급했던 제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주체적으로 일하는 알바로 한 단계 성장한 겁니다. 그래서 언니는 제 인생 최초의 사수예요.   

   

언니가 키워준 덕에 무럭무럭 성장한 저는 1 후쯤 저는  좋은 자리로 스카우트(?) 당하게 됐죠. 귀금속을 취급하는 덕에 부담감  액세서리 가게가 아닌 조용하고 한가한 음반가게... 어쩌면  성향에  맞는 곳에서 저의  번째 알바 인생이 시작된 거죠. 알바 마지막 , 서운함에 온몸으로 퉁퉁거리던 언니. 그게 제가 기억하는 언니의 마지막 모습이네요. 생각해 보면 제게 신급이었던 그때의 언니는 고작 20 중반의 풋풋한 청춘이었네요. 오래 손발 맞춘 동생과 헤어지면서 보내줘야 한다는  알지만 아쉬움을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던 어린 날의 언니와 그게 마냥  서운했던  어렸던 .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죠.

  

언니도 어느새 저처럼 한참 중년을 달려가고 있겠네요. 지금 언니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나요? 지금도 어디선가 일을 하고 있겠죠? 제가 아는 언니라면 지금도 부지런히 요령 피우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으리라 믿어요. 늦어도 많이 늦었지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사회생활을 처음 하던 제게 ‘바른 기준’이 되어줘서 고마워요. 그때의 언니가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밥벌이하면서 잘 먹고 잘 살고, 또 글을 쓰는 사람이 됐어요. 기댈 곳 하나 없던 제 사회생활의 시작에 언니가 있었네요. 언니가 있어서 닿기만 해도 으스러지는 연두부 같던 제 멘탈은 부침두부 정도로 단단해질 수 있었어요. 언니가 온몸으로, 행동으로 보여준 그 기준들 가슴에 품고 앞으로도 착실하게 실천하면서 살게요. 어디서든 무탈하고, 지극히 언니다운 모습으로 지내시길 바라요.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다리며 느닷없고 두서없는 긴 편지를 마무리할게요. 보고싶어요.




+ 그나저나

언니를 인간 크리스마스트리로 만들었던

그 초록색 퍼 코트의 안부도 궁금하네요.

아직 언니 옷장에서 숨 쉬고 있나요?

아님 일찌감치 헌 옷 수거함에 들어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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