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자의 결정 지연증에 대하여
오랜만이죠? 팀장님의 서글서글한 미소는 여전하고요?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사무실에 나와 회의가 한 창일 때, 전화기 너머에서 ‘아빠 언제 오시냐’고 병아리처럼 삐악 거리던 아이들도 이제는 팀장님 덩치를 넘어설 만큼 컸겠네요. 일 우선주의였던 당시 업계 분위기와 달리 일보다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던 다정한 팀장님의 모습,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그때가 제가 막내 딱지를 갓 땐 4년 차 때였는데 이제는 당시의 팀장님 보다 나이도 연차도 더 많아졌네요.
2000년대 중후반, 당시만 해도 핫하디 핫했던 청담동 고개 위 음악방송국. 절친한 선배의 부름으로 신규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합류하게 되면서 처음 팀장님과 만났잖아요.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팀장님의 첫인상은 ‘음악방송이 아니라 정책방송에 계셔야 할 분이 왜 여기 계시지?‘ 였어요. 그곳은 염색을 넘어 탈색은 기본, 피어싱에 과감한 옷차림까지... 연예인 못지않은 스타일링이 당연한 분위기였잖아요. 그런 곳에 마치 공무원처럼 단정하고, 단조로운 차림새의 팀장님은 오히려 더 튀었어요. 그다지 패션에 해박하지 않은 제가 하기에는 선을 넘는 말이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제 기억 속에 팀장님의 단정함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좋게 받아들여주시면 좋겠네요.
그때 한창 유행이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무사히 론칭하는 게 우리에게 주어진 당면 과제였죠. 스폰서가 어마어마한 대기업이었던 덕에 도와주는 건 없으면서 숟가락 얹는 인간들이 차고 넘치게 많았잖아요. 각종 컨펌이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겹겹이 쌓였던 날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프리랜서인 저야 적당히 시키는 일만 하면 되지만 팀장님은 프로그램 안팎, 회사 위아래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게 주 업무였죠.
생각해 보면 남한테 쓴소리 한 번 안 하는 순한 계란탕 같은 팀장님께 잔인하기 짝이 없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불닭 맛을 넘어 마라 맛쯤 됐겠죠? (이 프로그램의 탄생은 본인의 기획이 아니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오더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어요. 그제야 팀장님의 텐션을 이해하게 됐어요.) 인간을 극한으로 몰아야 ‘씹을 거리‘가 생기는 서바이벌 장르의 특성상 어떻게 하면 출연자들의 본성이 나오게 쥐어짤까? 어디에 어떤 고난이라는 장애물을 심을까? 예상을 깰 결말을 위해 어떻게 비틀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게 회의의 전부였잖아요.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일들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쌓여 갈수록 보드라운 백설기같이 뽀얗던 팀장님의 얼굴은 거칠한 시멘트 빛으로 변했죠. 그럴 때마다 시계를 훔쳐보며 이 제자리걸음 같은 회의는 언제 끝나나 목을 빼고 기다렸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이었잖아요. 잠잘 시간은커녕 잠깐 집에서 옷만 갈아입고 나오는 날들이 이어졌죠. 밥을 나가서 먹을 여유도 없어 회의실 테이블 위에서 배달 음식으로 연명하는 게 당연한 시간. 그때의 경험 때문일까요? 지금도 사무실 책상에 앉아 먹는 상황이 되면 전 공복을 택합니다. 화장실 가는 척하며 막내에게 식사 마무리 분위기가 되면 톡을 달라 부탁하고 사무실에서 슬쩍 빠져나오죠. 장거리 비행할 때, 의자에 결박당한 채 기내식 먹듯 회의실 책상 앞에서 웅크린 채 밥을 먹고 나면 소화가 영 안 되더라고요. 동료들이 밥을 먹는 사이 잠깐 사무실 바깥을 산책하며 신선한 공기로 빈속을 채우곤 합니다.
개복치이자 조무래기인 제가 그 프로그램을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게 뭔지 아세요? 일단 호떡 뒤집듯 뒤집히는 출연자들의 변덕은 아니었어요. 다 된 밥에 폭탄을 떨어뜨리듯 제로 세팅을 만드는 스폰서의 오더도,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도 참을만했어요. 세팅부터 본 촬영에 이어 마무리 인터뷰까지 치면 20시간은 족히 넘는 네버엔딩 촬영은 오히려 즐거웠어요. 사실 절 가장 괴롭게 했던 건 팀장님의 ’ 결정 미루기‘였어요.
시야가 좁디좁은 일개 실무자 입장에서는 그게 궁금했어요. 왜 좋은 선택을 할 충분한 시간이 있는데 미루고 미루다 최악만 면하는 선택을 할까? 팀장님의 ok사인이 떨어지기 전까지 모든 일은 일시 정지. 그 차후의 일들도 도미노처럼 차곡차곡 넘어졌죠. 무한 대기의 시간이 끝나면 꽁지에 불이 붙은 닭처럼 달려야만 했죠. 그러니 결과가 좋을 리 있나요? 겨우 벌어진 틈을 메우기 급급했죠. 딱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힘으로 프로그램을 겨우 끝낼 수 있었죠.
기억하세요? 여의도에서 마지막 촬영을 끝냈던 날, 비가 왔었어요. 새벽 3시가 훌쩍 넘은 시간, 촬영장이었던 호텔 밖을 나오자 비가 쏟아지더라고요. 1명의 우승자를 탄생시키기 위해 존재했을 (서류 심사까지 합치면) 수천, 수백 명의 탈락자가 흘린 눈물이 비가 되어 쏟아졌던 걸까요? 비도 오고, 대중교통은 이미 끊긴 지 한참이라 조무래기들끼리 모여 어떻게 집에 가나 고민하고 있을 때. 택시 타고 가라며 주머니에 지폐 몇 장 찔러 주신 거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심야 택시를 타고 경기도 언저리의 집에 도착하기까지 이동 시간이 꽤 길었는데도 이상하게 잠이 안 오더라고요. 촬영하면서 방송도 내보냈어야 해서 몇 주째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드디어 끝이구나. 날아갈 듯한 해방감 때문에 그냥 잠들긴 아쉽더라고요.
저도 챙기고 눈치 봐야 할 줄줄이 후배가 생기고 개인보다는 팀, 과정보다는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가 된지도 한참이네요. 어느 정도 머리가 크고 보니 팀장님의 고민이 왜 그리 길었는지 그제야 이해하게 됐어요. 연차가 쌓이면서 조무래기 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게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요. 실무자에게는 눈앞에 놓인 하나의 결정이지만, 책임자에게는 그 모든 결정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정교하게 엮여 있더라고요. 그러니 실무자에게는 불필요하게 길게 느껴지던 ’ 결정의 시간‘이, 정작 책임자에게는 한없이 부족한 ’ 신중의 시간’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거죠. 지금의 저보다 한참은 더 어렸을 그때의 팀장님. 이 무게를 오롯이 혼자 감당했어야 했을 테니 팀장님은 얼마나 버거웠을까요? 그 시절의 전 그걸 알 리 없으니 내일이 없는 하루살이처럼 그렇게 날뛰었던 거겠죠. 늦어도 한참 늦은 후회가 밀려옵니다. 역시 사람은 그 자리에서만 보이는 게 있나 봐요.
생각해보니 팀장님과 함께 일 하면서 처음 해 보는 게 많았네요. 서류심사와 면접으로 소위 ’ 도른 자 중의 도른 자‘ 고르기, 거의 당일치기 급이었던 1박 2일의 해외 촬영, 대기업 느님들과 전화기 붙들고 싸우기, 홍대 한복판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호객행위(?)하기, 폭탄주에 취해 청담동 골목을 한 마리 들짐승처럼 네발로 걸으며 포효하기 등등 지금은 돈 주고 살래도 살 수 없는 체력과 열정, 그리고 똘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거였겠죠? 몸과 마음은 괴로웠지만 분명 얻은 게 많은 시간이었어요. 일이든 일상에서든 ’ 선택의 순간‘이 되면 종종 팀장님을 떠올려요. 사방에서 날아든 화살에 지친 고슴도치가 된 팀장님의 얼굴요. 결정에 있어 최적의 타이밍을 놓치지 말자. 다짐합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팀장님의 이직 소식을 듣게 됐죠. 팀장님께 최적의 타이밍이 온 거였을까요? 음악 방송을 떠나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일하게 됐다고. 사람을 삼킬 듯 성난 파도가 매일 몰아치는 음악방송과 달리 잔잔한 호수 같은 곳이어서 마음이 놓였어요. 이직 소식을 들었을 때 길이도, 핏도 어정쩡한 옷을 내던지고 맞춤 정장을 입은 편안한 팀장님의 모습을 제멋대로 상상했었어요. 팀장님의 인자한 미소와 여유로운 발걸음이 딱 어울리는 곳에서 언제까지나 잘 지내고 계시리라 믿어요. 그 어느 때 보다 무탈함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날들이네요. 팀장님, 항상 무탈하시길 빕니다. 건강하세요.
예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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