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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an 26. 2022

어느덧 팀장이 된 후배 K에게

무럭무럭 자란 후배를 보는 마음


    

오랜만에 만나 3차에 이르는 밥과 차, 디저트를 나누고 헤어진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편지를 보내니 놀랐니? 사실 제대로 놀란 건 나야. 이제 막 코흘리개 딱지를 뗀 너를 만난 지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잖아. 그동안 수없이 너를 만났는데 지금껏 봐온 너와 그날의 네가 같은 사람인지 믿을 수 없을 만큼 넌 훌쩍 커버렸더라고. 안 보일 만큼 빨리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늘 깨 발랄했던 네가 이제 아니더라. 어제 만난 너의 말, 행동에서는 팀장의 근엄함 듬뿍 묻어나서 놀랐어. 이 똥강아지가 언제 이렇게 컸지? 싶어서 말이야.       


우리가 함께 같은 프로젝트에 몸담은 시간을 따져 보면 고작 1년쯤 될까? 근데 우리의 인연은 그 10배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하는 사이가 됐지. 단순히 날짜의 개수가 아니라 깊이를 따져 봐도 그 어떤 후배들보다 깊은 마음을 나눈 사이잖아. 단지 일로 만난 사이지만 사무실 밖에서도 함께 많은 시간을 나눌 만큼 우리는 절친했지. 프로젝트가 끝나고도 수없이 만나 수다를 떨었잖아. 출장이 아닌 너의 첫 해외여행 메이트가 나였고, 여행이 아니라면 안에 틀어박혀 있길 좋아하는 날 세상 밖으로 끌어 내 준 게 너였지. 나이 차이도 제법 나지만 직장 선후배 이상의 마음과 시간을 함께 나눠줘서 고마워. 서로의 기쁨과 성장을 누구보다 축하해주고 응원해 주는 사이여서 일까?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후배가 바로 너였어.     


우리가 처음 만났던 N 년 전 여름의 기억이 생생해. 사무실에서 첫인사를 나누고 아이스 브레이킹을 위해 사무실 건물 1층 카페에서 일에 관해 이야기하게 됐잖아. 이미 커피를 마신 터라 함께 팥빙수를 시켰었지. 나는 팥빙수 옆구리부터 조금씩 뒤섞어 먹는 편인데 넌 나와 다르더라. 상대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팥과 얼음을 무서운 기세로 뒤섞던 널 보며 얘 뭐지? 싶었어. 근데 한 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더라. 말이나 생각보다는 행동이 먼저인 친구라고. 함께 일을 하면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게 됐지. 나는 멈칫하게 되는 불편한 상황, 어려운 사람도 넌 몸으로 부딪쳐 결국 결과를 내고 네 걸로 만들어 냈잖아. 그런 널 보면서 참 많은 걸 배웠어. 주저주저할 때마다 나를 이끌며 넌 말했지.     


선배. 생각 그만!! 그냥 해요 우리.     

실행력 충만한 너의 그 말에 머리에 종이 띵! 하고 울리더라. 신중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생각 뒤에 숨어 있던 나를 끄집어내 준 너 덕분에 개미 코딱지만큼 좁디좁은 내 세계가 넓어진 게 분명해. 내가 너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 예를 들자면 사람과 거리가 없다거나 친근하다는 게 오히려 넌 고민이었지. 상대가 자신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같다는 고민. 내게 없는 그런 부분이 난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너는 단점이라고 여기고 있더라. 이렇게 달라서 우리는 친해졌던 걸까?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상대에게서 찾고 부러워했지. 가까이서 서로의 생각과 행동을 배우며 우리의 모난 부분이 조금씩 둥글어지고 또 희석됐는지 몰라.      


여느 때처럼, 삶의 고민과 걱정을 안고 만나 맛있는 걸 먹으며 풀어낸 어제. 네게서 이전과는 다른 아우라가 풍겼어. 네가 프로젝트의 팀장이 된 게 처음이 아니었는데 이번은 좀 달랐어. 우리가 못 본 사이 넌 꽤 단단한 사람이 되었더라고. 내가 가늠하지 못한 시련과 고민이 널 견고한 팀장으로 만들어 놓은 걸까? 시킨 일을 하기 바빴던 부사수 시절을 지나, 선배들의 불합리에 뜨겁게 불타오르던 허리 연차를 넘어, 얼떨결에 자기 팀을 꾸린 초보 팀장에 이어 한층 완연한 팀장이 됐더라. 큰 그림을 봐야 하고,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고, 또 돈의 흐름과 팀원들의 마음까지 헤아려야 하는 진정한 팀장이 된 거지. 단어의 선택, 말의 깊이, 생각의 조각에서 단단한 결의가 느껴졌어. 내가 키운 것도 아니고 네가 알아서 큰 건데 왜 내 마음에 대견한 마음이 차올랐던 걸까?     


무럭무럭 성장한 널 보면서 한쪽에서는 짠한 마음이 생기더라. 네가 감수하고 견뎌내야 할 시간이 보여서 말이야. 결정권자와 실무자 사이의 팀장, 그 외로운 자리에 네가 있는 거잖아. 그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차갑고 어두운 그늘. 그게 이제 서서히 네게도 드리우기 시작했으니까. 명랑 만화의 주인공처럼 한없이 해맑던 네게도 장(長)의 무게감이 느껴졌어.      


매해 그랬던 것처럼 서로 올해의 계획을 나누던 순간, 네 차례가 왔을 때 말했지. ’ 선배 저는 올해 안에 얼마 얼마를 모으는 거예요.‘라고. 그때 너의 눈에서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단단한 결의가 느껴지더라. 몇 해 전부터 사부작사부작 주식에 눈을 뜨고, 부동산 관련 자격시험 준비를 시작했다던 너.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하룻강아지가 이제 세상의 단맛, 쓴맛을 가늠할 수 있게 된 거야. 나이는 내가 더 많을지 몰라도, 네가 먼저 어른이 된 거 같더라. 이렇게 자리가 이렇게 사람을 만드나 봐. 들리는 게 많고, 보이는 게 많은 팀장 자리가 널 어른으로 만들었을까? 사람의 당당함은 실력이나 자신감뿐만 아니라 돈에서도 나온다지? 매일이 꽃길일 리 없는 날들이겠지만 먼지 폴폴 날리는 흙길도 꽃길처럼 신나게 걸어가는 너의 긍정 파워로 목표했던 그 숫자들에 닿기를 응원할게. 혹시라도 잠시 하소연하면서 바닥난 에너지를 채울 시간이 필요할 때는 SOS를 치렴. 늘 그랬던 것처럼 언제든 활짝 열린 귀와 적당히 열린 지갑, 낄낄 빠빠 모드의 입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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