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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Nov 09. 2022

도넛스럽게 말고 베이글스럽게

하찮은 도전과 시도가 우리를 구할 거야

  

양자경 주연의 기묘하지만 사랑스러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고 극장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머릿속에는 베이글이 둥둥 떠다녔다. #양자역학이나 #멀티버스(다중우주), #우주 점프’(Verse Jumping) 같은 문과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어려운 개념들이 난무하지만, 베이글에 대한 기억만은 확실하다. 과학과 철학, 가족드라마가 찰지게 버무려진 영화에서 까만 베이글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혼돈과 절망의 상징이자 인생의 좌절을 뜻한다. 자신의 꿈과 희망, 자신이 아끼는 모든 것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베이글은 지금껏 봐온 그 어떤 공포영화 속 연쇄살인마나 귀신보다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허무주의에 빠진 영화 속 빌런 조부 투파키는 베이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게 부질없다면,
살면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고통과 죄책감도 사라진다     


이 영화 때문이었을까? 영화의 여운이 은은하게 젖어있던 나는 며칠 후 가운데가 뻥 뚫린 베이글과 마주했다. 고등학교의 절친 A와 그녀의 대학 동기인 B를 만났다. B는 내 대학 동기 C의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한 얽히고설킨 요상한 인연이다. 종종 만나 맛있는 걸 먹으며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임이다. A는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로 매 끼니 손수 음식을 준비하다 보니 오랜만에 남이 만든 바깥 음식, 온전한 형태의 어른 음식, 사진 잘 나오는 성인 여자의 음식이 먹고 싶다고 했다. 싱글 시절에는 서울의 바깥, 경기도에 살면서도 주말이면 회사와도 거주지와도 거리가 먼 이태원과 강남으로 브런치를 먹으러 다녔던 부지런하고 세련된 도시 여성의 흔적이 남은 취향이었다. 그렇게 지금은 경기도 남, 동, 북에 흩어져 사는 우리는 단풍이 활활 불타오르던 양재 시민의 숲 근처 베이글 전문점에 모였다.     


매장 안은 근처 S 전자 직원들이 목에 출입증을 건 채 방앗간에 온 참새처럼 분주하게 커피와 듬직한 베이글을 공수해 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들 놀 때 노는 것보다 남들 일할 때 노는 즐거움은 제곱이 된다. 그들 사이 우리는 느긋하게 평일 브런치를 영접할 기쁨에 내적 탭댄스를 추며 주문대 앞에 섰다. 거대한 진열대를 빼곡하게 채운 각종 베이글과 크림치즈를 스캔한 후 TV 보험 광고 속 약관을 읽는 성우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주문했다. 곧 우리 테이블에는 거대한 베이글 파도가 몰아쳤다. 따끈한 감자 수프, 무화과 샐러드는 거들뿐. 갈릭 베이글과 베이컨 쪽파 크림치즈, 에브리띵 베이글과 허니 윌넛 크림치즈, 속재료를 넘치게 품은 에그 아보카도 베이글 샌드위치까지 자리가 모자라도록 각종 베이글이 올라왔다. 하루아침에 뚝 떨어진 기온에 실내에는 난방기기가 열심히 온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우리는 야외 테라스석으로 향했다. 끝물을 향해 가는 단풍을 악착같이 즐기기 위해 담요를 둘둘 말고 앉아 베이글을 먹... 아니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각자의 속도와 방향으로 40대를 통과하고 있는 세 명의 여자 사람은 묘하게 베이글을 닮아 있었다. 달고 기름진 도넛 말고 담백하고 쫀득한 베이글 말이다. 결혼, 임신, 출산, 유아 육아라는 인생의 과업을 서서히 마무리해가는 동시에 경력 단절이라는 차가운 현실과 마주한 A. 영끌해 아파트를 장만했지만 무섭게 치솟은 금리에 숨이 턱턱 막힌다는 B. 그리고 부딪히고 깨지면서 인생 2라운드를 준비 중인 나. 흘깃 보면 베이글처럼 속이 단단하게 꽉 차고 반들반들 윤이나 보이는데, 가슴에 각자 커다란 구멍을 안고 살아가는 중이다.      


내신 성적이 비슷해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고, 수능 성적이 비슷해 같은 대학을 나온 사이. 딱히 뭐가 뛰어나거나 모자라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우리는 지금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다. 반죽 시절에는 별반 다르지 않은 베이글이 어떤 토핑을 얹고, 어떤 크림치즈를 얹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양과 맛의 베이글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속 재료를 아낌없이 넣은 베이글 샌드위치처럼 속이 풍성한 A. 엄마로, 딸로, 아내로 역할을 해내느라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며 바쁘게 산다. 밥 대신 먹어도 부족하지 않을 갈릭 베이글 & 베이컨 쪽파 크림치즈처럼 천성이 든든한 B. 또래보다 늦은 출발이었기에 더 혹독했던 회사 생활 1기를 마무리한 후 잠시 쉬어가는 사이 새롭게 눈뜬 ‘덕후의 삶‘을 악착같이 즐기고 있다. 참깨가 빈틈없이 뒤덮은 에브리띵 베이글 & 허니 윌넛 크림치즈처럼 여기저기 굴려지고, 이것저것 섞이고 있는 나. 처음 해보는 많은 것들 앞에 좌충우돌 중이다. 서서히 시행착오도 줄여가고 선명한 미래를 향해 멈추지 않고 한 발짝이라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20대의 우리는 20년이 흘러 결국 각자 자신이 되어 가는 중이다. 한때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불안에 떨기도 했지만 부질없어 보이는 하찮은 도전과 시도를 야금야금하다 보니 어느새 마흔이 훌쩍 넘어 버렸다. 각자 고유의 맛과 향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알뜰살뜰 챙겨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가을날의 브런치 호사처럼 소소한 기쁨도 놓치지 않는 현명함을 품은 채.   


우리의 삶은 누군가의 눈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젠 그런 시선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내성과 내 속도와 방향으로 가도 된다는 확신이 있다. 감히 반죽 시절에는 꿈도 못 꾸던 작고 가녀린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우유, 달걀, 버터, 화학첨가물 같은 재료 없이 오직 이스트와 밀가루, 물로 만들지만 건강하고 든든한 베이글스러운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나 자체로 맛있게 사는 법을 알고, 나에게 어울리는 크림치즈의 종류가 뭔지 정확히 매칭 할 수 있는 취향과 기호가 명확한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이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한 살 한 살 먹어가며 절실히 깨닫는다. 다음에 만날 때는 우리는 또 몇 단계의 레벨업을 이룬 인간 베이글이 되어 있을까? 게으름을 부릴 여유가 없다. 바지런한 저들과 또 나란히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려면 오늘의 자극을 부스터 삼아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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