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구역 슈퍼마켓에 붙은 마지막 인사를 보고서
새 아파트로 독립한 지인의 집들이에 초대받았다. 경기도 북쪽에서부터 대중교통을 갈아타고 2시간여를 달려 서울 서남부 끝의 작은 동네로 향했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자 예상 밖의 풍경이 펼쳐졌다. 지인의 집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더 가야 하는 거리. 택시를 타긴 애매하고, 마을버스는 배차 시간이 맞지 않았다. 일단 걷기로 한다. 지하철역에서 출발해 한 5분 정도는 호프집, 백반집, 고깃집, 횟집이 늘어선 흔한 번화가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의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건물마다 날 선 출입 금지 딱지가 붙었고, 밤새 야반도주라도 한 듯 버리고 간 집기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무슨 역병이라도 돌았나 싶어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골목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햇빛 쨍한 낮이었기 망정이지 저녁 어스름이었다면 감히 걸어갈 용기도 안 날 분위기였다. 벽돌이 다 떨어져 나간 저 건물 모퉁이를 지나면 굶주린 도시 좀비들이 튀어나올 거 같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흉기로라도 써야지 싶어 핸드폰을 꼭 쥐고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난 브랜드의 새 아파트 단지들이 보였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반짝이는 아파트 건물 사이로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젊은 부부, 늦은 주말 브런치로 먹을 빵을 사러 나온 사춘기 딸과 엄마, 머리에 까치집을 그대로 얹은 채 커피를 사러 나온 트레이닝복 차림의 남자가 바쁘게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옷장, 냉장고, 침대, 하다못해 과일 찍어 먹는 포크까지 손 닿는 모든 게 새것으로 가득한 집에 살기 시작한 지인은 어색한 표정으로 첫 집들이 손님들을 맞아줬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내가 걸어온 그 동네의 진실에 관해 물었다. 좀비 영화 세트 같은 그 동네는 대체 뭐 하는 곳이냐고.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았던 지인은 말했다. 그곳 역시 이제 곧 재개발에 들어갈 곳이라 주민이며 상인들이 한창 이사를 나가서 텅텅 비었던 거라 했다. 지금 지인이 살고 있는 ‘새삥’ 아파트 역시 불과 몇 년 전에 저런 분위기의 땅 위에 지은 거라고 했다. 몇 년 후에는 그곳 역시 이 아파트처럼 번듯한 아파트 단지가 될 곳들이었다.
빨리 그 어수선한 골목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사람이 없어서 무섭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오면 더 무서웠을 그 골목이 언제 끝나나 싶었다. 쫄보력을 잔뜩 뽐내며 두리번거리다 눈에 들어온 안내문이 있었다.
오랫동안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는 **운수 정문 근처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달력 뒷장에 매직으로 휘갈겨 쓴 슈퍼마켓 사장님의 손 글씨 인사 아래로 새로 이전하는 주소와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그 손 인사 안내문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렀다. 수십 년간 한자리에서 자리를 잡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게를 열고, 손님을 맞았을 사장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 끝과 시작이 끊임없이 이어지는데도 우리는 종종 잊는다. 끝은 그저 끝일뿐이라고 매몰차게 돌아선다. 끝은 새로운 시작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도 끝이 서운하고 싫어서 제대로 마무리하는 일에 소홀하다. 끝을 잘 마무리하는 사람만이 잘 시작할 수 있다. 빈틈없이 문을 잘 닫아야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닫은 문 사이로 애써 높여 놓은 방안의 온기가 술술 빠져나간다.
그 사장님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그 슈퍼마켓은 왠지 인심이 좋을 게 분명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다들 떠밀리듯 빠져나간 재개발 구역에 다정한 손 글씨 인사를 남겨둔 사장님의 성품이 짐작됐다. 그렇게 끝을 잘 마무리하는 사람은 시작도 잘 해낼 것 같은 밑도 끝도 없는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일면식도 없는 **운수 앞에서 새롭게 시작할 슈퍼마켓 사장님을 격하게 응원하고 싶어졌다. 분명 끝의 허탈함을 힘겹게 털어내고, 기대와 불안을 안고 새로운 시작을 할 슈퍼마켓 사장님의 가게에 손님이 넘쳐나길 기대한다. 다음번 지인의 집에 갈 때는 그 **운수 앞 슈퍼마켓에 가서 두루마리 휴지를 사서 가야겠다. 그때까지 슈퍼마켓 사장님이 새로운 가게에서 잘 뿌리내리고 계실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