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숫자 아니라 편안함
새 운동화를 사기 좋은 계절이 있을까?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게 봄은 새 운동화를 사는 계절이다. 겨울 동안은 신던 운동화를 신어도, 바깥 활동이 많아지는 봄에는 산뜻한 새 운동화를 신고 싶다. 몇 해 동안 여름을 제외한 봄, 가을, 겨울 동안 잘 신었던 까만 스니커즈가 수명을 다해가는 게 보였다. 바닥은 닳아 눈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미끌거려 사고가 날뻔한 적도 여러 번, 하도 접었다 펴진 탓에 오른쪽 발등뼈 머리 쪽 부분에는 구멍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민망한 꼴 당하기 전에, 후임을 물색해야 했다. 평소 입는 옷의 70%는 검은색이라 일단 색깔은 블랙. 까만 운동화를 찾기 위한 긴 여정을 떠났다. 아무리 가격이 저렴하다고 해도 신발은 무조건 신어 보고 사는 편이다. 지친 퇴근길, 집 근처 전철역에서 내려 번화가의 여러 스포츠 브랜드 제품을 파는 멀티숍으로 향했다.
먼저, 매장에서 가장 목 좋은 곳에 자리한 N사 제품부터 둘러봤다. 평소 운동화를 산다고 하면 별 고민 없이 향하는 N사. 발볼이 좁은 편인 내 발에는 잘 맞는 운동화가 많았다. 그래서 양이나 종류를 따져도 내 운동화 역사에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브랜드다. 일단 호감 50%를 깔고 둘러보기 시작했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디자인은 둘째치고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그렇다고 가격표가 눈에 안 들어올 정도로 눈을 사로잡는 디자인을 뽐내는 제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패스하고 다음은 A사. 디자인은 예쁘지만 내 발에는 묘하게 펑퍼짐한 A사 운동화는 보는 둥 마는 둥 지나쳤다. 그다음은 스케이트 보더들의 사랑을 받는 브랜드 V사. 몇 번 시도해봤지만 내 발에는 밑창 고무 무게가 무겁게 느껴져 번번이 결제 직전에 포기했던 인연 없는 브랜드였다. 그런데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V사의 스테디셀러 제품이 할인 스티커가 붙어 있는 걸 보고 눈이 반짝였다. 직원에게 평소 운동화 사이즈인 235 제품이 있는지 물었다. 친절하고 노련한 직원은 스마트폰으로 재고를 확인하더니 그 사이즈는 이제 딱 2개 남았다며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곧 새 운동화가 당도했고, 주섬주섬 운동화를 신어 봤다. 그런데 이상했다.
발은 영 헐거운 느낌이었다. 며칠 사이 내 발의 살이 빠진 건 아닐 테고, 답은 하나였다. 내가 평소 신은 N사와 사이즈 체계가 다른 거다. 똑같이 235mm라고 표기되어 있다 하더라도 발 볼이나 디자인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다. 결국 사이즈를 내려 230mm를 신어 보고서야 이전에 신던 신발의 편안함을 찾았다. 게다가 230 사이즈를 신고 테스트 겸 걸어봤는데 생각보다 신발은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공산품이니 몇 달 사이에 바닥재를 초 고기능성 신소재로 바꿔서 그런 건 아닐 거다. 그저 내 마음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을 거다. 할인 스티커 하나에 파전 뒤집듯 마음을 휙 뒤집은 자신이 이어 없어 픽 웃음이 났다. 그간 꾸준한 운동으로 이전에 비해 다리에 근육이 붙은 덕이라고 마음대로 결론을 짓고 나니 마음이 가벼웠다. 한결 가뿐한 기분으로 계산한 후 매장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향하며 오늘의 성과물, 손에 쥔 새 운동화가 제대로 들어가 있나 쇼핑백을 내려보다 낡은 운동화가 보였다. 조금 전 매장에서 사이즈 확인하기 위해 의자에 앉아 같은 235mm 운동화를 신었다. 왼쪽에 신은 낡은 N사 운동화는 딱 맞았지만 오른쪽에 신은 V사 새 운동화는 헐렁했다. 똑같이 235mm라는 사이즈 표를 달고 태어났지만 두 운동화는 달랐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도 이 운동화처럼 겉으로는 똑같이 235mm로 적혀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맞을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헐렁하게 느껴지기도 하겠지?
분명 내가 같은 텐션과 태도로 대해도 상대방이 어떤 마음의 넓이로 나를 받아 주느냐에 따라 나는 빡빡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또 헐렁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호감과 비호감이라는 마음의 볼은 정해져 있고, 견고한 그 사이즈를 넘어서긴 어려운 일이다.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나는 상대방에 맞춰 자신을 늘이고 줄이기를 반복했다. 235라는 내 사이즈를 무시하고 나를 빡빡하게 느끼는 사람에게는 더 웅크려 230을 만들고, 나를 헐거워하는 사라에게는 240으로 부풀렸다. 그러니 탈이 날 수밖에. 적지 않은 사건을 통해 내가 235 사이즈인데 상대방에 맞춰 나를 무리하게 줄이거나 늘릴 필요가 없다는 경험을 얻었다.
고무 밑창이 무거워 살까 말까 고민하다 매번 결제 단계에서 탈락했던 A사 까만색 스니커즈. 수년 동안 고민했던 게 부끄러울 만큼 애착 운동화가 됐다. 청바지나 트레이닝복은 물론 슬랙스 같은 차림에도 두루 어울렸다. 미팅을 갈 때도, 산책할 때도, 마트에 갈 때도 새 운동화와 함께한다. 깊고 진한 의심이 켜켜이 쌓여 있던 운동화여서일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내 발과 마음의 편안함’이라고 말하는 230 사이즈 까만 스니커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