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물가 상승의 흔적
일요일 점심, 오랜만에 가족끼리 다 모였다. 근처에 사는 작은언니네 가족 넷, 우리 집 넷. 총 여덟 명이 모인 곳은 우리 가족의 오랜 단골인 돼지갈빗집이었다. 집에서 7분 거리에 있다가 몇 해 전 15분 거리쯤으로 이전했다. 거리는 멀어져도 종종 돼지갈비를 먹으러 갔다. 좌식 바닥을 온몸으로 기던 조카들이 커서 이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스마트폰에 빠져 있는 흔한 청소년이 될 때까지 우리 가족의 많은 날에 그 돼지갈빗집이 있다.
이 집에 단골이 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집에서 가까워서. 둘째, 아빠가 좋아하는 메뉴가 돼지갈비라서. 셋째, 아빠는 반찬이 많이 나오는 집에 가야 뭘 잘 먹었다는 지독한 편견이 있는 사람이라서. 가족 식사 때의 메뉴 선택권 및 식당 선택권을 수십 년째 독점하고 있는 아빠의 선택은 중식당이 아니라면 늘 이곳이었다. 아빠의 전폭적인 애정을 아는지 서글서글한 주인은 우리 가족이 오면 일단 아빠께 살갑게 인사를 한 후, 꼬맹이들을 위해서는 음료수 서비스를 내준다. 돈을 내는 건 대부분 인사를 받는 노년의 부모님도, 서비스받는 미성년자도 아니다. 경제활동을 하는 성인들, 언니나 형부나 나나 동생이다. 그런데도 어르신과 아이들에게 친절과 서비스를 아끼지 않으니 불만 없이 돈을 낸다.
한창 코로나19가 기승일 때는 대부분 포장을 해와 집에서 먹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눈치 보지 않고 편안히 3대 가족이 모였다. 언니네 가족이 먼저 와 주문했고, 우리 가족도 곧 합류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이 차려져 있었다. 유자 드레싱을 곁들인 양상추샐러드와 쌈무, 고추장아찌, 유채 된장무침, 열무김치, 오징어 숙회, 데친 브로콜리, 간장 양념장을 얹은 연두부, 된장찌개 등등 수 형형색색 반찬들이 상을 빈틈없이 채웠다. 앉자마자 빛의 속도로 도착한 숯불 위에 고기를 올린 후 익기를 기다리며 대낮부터 잔에 술을 채웠다. 소주, 맥주, 소맥. 각자의 취향에 맞는 술이 채워진 잔을 부딪혔다. 새로운 시작이 많은 3월, 잘살자는 응원과 격려가 이어졌다. 수다를 떠는 사이 노릇하게 익은 돼지갈비가 각자의 입으로 들어갔다.
이미 성인인 나보다 더 큰 신발을 신을 만큼 무럭무럭 크는 중인 초등학교 고학년 막내 조카가 돼지갈비 2.5인분과 물냉면 반 그릇을 먹고서야 젓가락을 놨다. 열과 성을 다 해 먹던 마지막 주자, 조카가 일어서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족들도 자리를 정리했다. 2차는 갈빗집 건너편의 작은 카페로 돼지갈비 냄새를 폴폴 풍기며 들어갔다. 다시 8잔의 음료와 크로플 2개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수다를 떨었다.
오랜만에 돼지갈비 먹으니 맛있네.
요즘 워낙 물가가 미쳐서 가격이 많이 올랐을 거라 생각했는데
동네 장사라 그런지 1인분에 천 원 밖에 안 올랐어.
천 원 올려서 그런가? 반찬 가짓수가 많아졌어.
그러네 예전보다 가짓수 많아졌어. 아빠 좋겠네.
우리 얘기를 조용히 듣던 엄마가 말했다.
반찬 가짓수는 늘었는데 그게 없어. 양념게장.
그러고 보니 정말 ’ 게장’이 없었다. 매콤 달달한 윤기 좌르르한 빨간 양념에 버무린 게장이 테이블에서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돼지갈비가 익기도 전에 양념게장부터 공략하는 사람이니 게장의 부재를 본능처럼 알아챌 수밖에 없다. 돼지갈비를 먹을 만큼 먹으면 아직 열기가 사라지지 않은 숯 위 석쇠에 양념게장을 얹는다. 생으로 먹는 것도 맛있지만 이렇게 살짝 구워 먹는 게 또 별미다. 양념이 석쇠에 붙어 떼기 힘들어지니 종업원들이 눈치를 주기 때문에 몰래 구워 먹는 눈칫밥이 더해져서 맛있게 느껴졌던 걸까? 매콤 달달한 양념이 살짝 열기에 졸아들어 찐득찐득한 양념 맛과 부드럽고 달짝지근한 익은 게살이 어우러져 간장 양념의 돼지갈비에 찌든 입에 적절한 환기를 시켜준다.
십수 년째 한 자리를 지키던 돼지갈빗집의 양념게장이 사라진 걸 보니 물가가 무섭게 오른 게 체감됐다. 메뉴판 가격의 숫자가 바뀐 것보다 양념게장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게 더 슬펐다. 손 닿는 거리에 있는 소소한 기쁨이 하나 또 사라졌다. 3천 원어치 사면 1개쯤 인심 좋게 더 넣어 주던 붕어빵 덤도 사라졌다. 스트레스가 기준치 이상 쌓일 조짐이 보일 때 애착 곰 인형을 끌어 안 듯 끌어안고 먹던 노래방 새우깡도 5천 원짜리 한 장으로는 살 수 없는 귀하신 몸이 됐다. 늘 하던 대로 분식 노점에서 순대와 떡볶이 각각 1인분씩 포장하고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넸는데 2천 원만 돌아왔다. 놀라 가격표를 보니 야금야금 올라 1인분에 각 4천 원의 시대가 됐다. 세. 상. 에.
먹는 데 진심인 사람에게 이렇게 작지만 큰 기쁨을 주는 존재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는 걸 확인할 때마다 팔다리가 잘려나간 기분이 든다. 에너지 급속 충전소 폐쇄 같은 수준의 사고이자 사건이다.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 ‘잠’이나 사람과 장소, 시간이 필요한 ‘수다’와 달리 사소한 음식들을 가지기 위해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 약간의 돈만 있으면 언제든 나의 ‘쁘띠 행복’을 채워준다. 그런 작고 귀여운 음식들이 무서운 물가의 기세에 소리 없이 사라져 간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어김없이 꽃은 피겠지만 죽이 잘 맞는 오랜 친구 같던 돼지갈빗집의 양념게장을 잃었다. 헛헛하다. 쓸쓸하다. 2023년 3월은 더없이 슬픈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