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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r 13. 2023

대퇴사의 시대를 살아가는 법

피할 수 없는 3, 6, 9의 고비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미용실 거울 앞에서 손가락을 굽혀가며 숫자를 세어봤다. 여섯. 그래 6개월이면 옮길 때도 됐지.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A 씨를 처음 만난 건 작년 가을. 오래 머리를 맡겼던 헤어 디자이너가 독립해 자신의 가게를 열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새로 둥지를 튼 곳에 나도 따라 이동했다. 오랜 미용실 유목민 생활을 청산하게 해 준 그분을 쫓아 오래 다니던 미용실을 옮겼다. 디자이너 둘에 스태프 한 명이 전부인 아담한 미용실에서 유일한 스태프인 A 씨. 그는 만능이었다. 손님을 자리로 안내하고, 커트보를 세팅하고, 머리를 감겨주고, 중화되는 동안 바닥에 쌓인 잘린 머리카락을 빗자루로 쓸었다. 머리를 말려주고, 어질러진 집기들을 묵묵히 정리했다. 간혹 앞으로 시술이 얼마나 남았냐? 는 질문에 몇 분 정도 남았다고 대답하는 게 전부일뿐, 먼저 말을 거는 일도 없었다. 웃음소리, 말소리도, 동작도 크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일했다. 시끄러운 배기음을 길거리에 흩뿌리며 존재감을 뽐내지 못해 안달 난 튜닝카가 가득한 세상에서 묵직하고 고요한 검은 세단처럼 일했다.       


지난 설 연휴가 끝난 후 머리를 한 후 2개월 만에 다시 찾은 미용실에는 낯선 남자가 A 씨 자리에 있었다. 사람이 들고 나는 게 어색하지 않은 곳. 시시콜콜 미용실 스태프들과 수다 떠는 깜냥이 아니라 지금까지 봐온 수많은 그들처럼 조용히 다음 향로로 걸어갔을 거라 생각했다. 길게 본 건 아니지만 그 조용하고도 단단한 성정이라면 어디서든 잘 해내리라는 밑도 끝도 없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A 씨가 어디로 갔는지 몰라 닿지도 않을 응원을 마음으로 보냈다.      


머리카락이 두피에 바짝 달라붙어 지구에서 제일 못생긴 상태로 염색약이 스며들기를 기다리며 책을 읽는 중이었다. 한 단락만 읽으면 이번 챕터도 끝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A 씨 자리에 새로 온 보조 스태프가 말했다.      


샴푸 하러 가실게요.     


으응? 약간 이상했다. 의아함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상태로 샴푸대에 머리를 뉘었다. 익숙하게 배부터 무릎까지 큰 타월을 덮어 주고, 물 트는 소리가 났다. 친근한 루틴이다. 다음에는 어떤 질문이 날아들지 나는 안다.      


물 온도는 괜찮으세요?    

 

으으으응? 익숙한 목소리다. 6개월 동안 들었던 그 목소리.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설익은 두피 마사지하는 손길도 낯설지 않다. 눈을 감고 생각했다.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인가?     


샴푸가 끝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머리를 감겨준 직원이 무언가를 가지러 샴푸대 쪽으로 향한 사이, 담당 디자이너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 직원, 새로 오신 분이시죠?       


내 질문을 들은 디자이너가 빵 터졌다. 계속 일하던 A 씨가 맞았다. 겸연쩍어 얼른 ’어머 스타일이 달라지셔서 못알아 봤어요 ‘라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사이 더 잘 생겨져서 못 알아보실 만도 하다 ‘며 디자이너는 나의 민망함을 지워주는 농담을 던졌다. 두 사람의 어이없는 수다를 들은 A 씨는 얼굴이 빨개졌다. 귀까지 빨개지는 걸 보니 A 씨가 맞았다. 예전이었다면 마스크 속에 숨어 붉게 물들었을지도 몰랐을 A 씨의 얼굴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대체 나는 왜 새로운 직원이 왔다고 생각했을까? A 씨를 마지막으로 본 2개월 사이 변한 게 몇 가지 있었다. 하나는 실내 마스크 해제, 그리고 또 하나는 계속 짧았던 A 씨의 앞머리가 살짝 긴 웨이브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코로나 시국이 한창이던 때에 마스크를 낀 상태로만 봤으니 마스크 안의 A 씨 이목구비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모른다. 게다가 처음 만났을 때는 갓 제대한 사람처럼 짧은 스포츠형 머리였는데 이제 A 씨는 한창 머리를 기르는 중이라 앞머리가 광대뼈까지 내려와 있었다. 마스크의 유무와 헤어 스타일의 변신 콜라보 덕분에 나는 A 씨를 알아보지 못했다.     

 

미용실에 새 직원이 왔다고 생각하자마자 나는 숫자부터 세봤다. 이전 직원이 얼마나 일을 했는지부터 가늠해 본 거다. 6개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나야 2~3개월마다 길어야 2~3시간 정도 머무니 모르지만, 이 작은 미용실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일이 있을까? 게다가 손님인 내게는 한없이 친절한 디자이너도 A 씨에게는 어떤 상사일지 나는 알 수 없다. 6개월 정도면 어느 정도 일도 손에 익고, 판의 흐름도 보이니 고민하기 쉬운 때다. Go이냐? Stop이냐? 결정을 내릴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직장인에게는 3, 6, 9의 고비가 있다고 했던가? 반복되는 권태로움에 3개월 주기마다 이직 혹은 퇴사를 고려하는 상태로 일명 '369 증후군'으로 부르기도 한다. 3개월 정도면 일의 흐름이 파악되고, 6개월 정도 지나면 선배나 사수의 모습을 통해 미래의 내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9개월이 되면 내가 속해 있는 직장의 업계 내 위치가 눈에 들어온다. 369 증후군에 시달리는 누군가를 봐오기도 했고, 나 역시 지독한 369 증후군을 앓기도 했다. 그러니 그 선택이 얼마나 많은 고민 속에 내린 결론이라는 걸 알기에 A 씨의 퇴사에 대해 아쉬움보다는 응원의 인사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 A 씨는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단단한 사람이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시작한 듯한 미용 업계에서 조용히 승부를 보고 있었다.     


A 씨는 늘 있던 그 자리에 있다. 어쩌면 6개월의 고비를 겨우 넘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A 씨의 앞에는 9개월, 1년, 다시 3년, 6년, 9년의 시커먼 고비가 흉폭한 악어처럼 입을 쩍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 언제까지 이 미용실에서, 아니 이 미용 업계에서 발을 딛고 서 있게 될까? 조용한 퇴사가 만연한 이 시대에 A 씨의 조용한 행보가 오히려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렇게 조용히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에 이 사회가 삐걱거릴지언정 꾸준히 굴러가고 있는 건 아닐까? 대퇴사의 시대, 조용한 퇴사와 시끄러운 정리해고에 대한 뉴스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현실 한가운데에 살고 있다. 그런 뉴스를 들을 때마다 일렁이던 마음의 파도를 토요일 오후, 미용실 한가운데에서 정면으로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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