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지하철에서 느낀 말 한마디의 힘
새벽 6시 무렵 7호선을 갈아탄다. 아직 잠을 다 털어내지 못한 채 반수면 상태로 환승 통로를 걷는 사람들 사이에 나도 있다. 얼마 전 목요일, 환승하느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한 탓에 숨을 헐떡거리며 겨우 의자에 앉았다. 새벽 지하철 안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눈을 감고 잠을 자거나, 잠이 가득한 눈을 비비며 스마트폰에 푹 빠져 있다. 각자의 스타일로 조용히 새벽 지하철에 몸을 싣고 목적지로 향한다. 나도 자리를 잡았으니 잠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3~4 정거장 후에는 스르르 잠이 드는 게 보통의 패턴이다. 귀 깊숙이 꼽은 이어폰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에 감탄하며 몸과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려는 찰나! 안내 방송이 들렸다.
이 열차는 **행, **행입니다. 이 열차는 잠시 후인 6시 *분 정각에 출발합니다. 목적지를 확인하시고 탑승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는 피곤과 냉소로 가득 찬 새벽 지하철에 어울리는 흔한 안내 방송이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곧 길고 긴 안내 방송이 이어졌다. 열차가 혼잡할 때는 출입문 쪽을 비워달라, 문이 닫히는 신호가 들리면 억지로 타지 말고 다음 열차를 이용해라, 난방을 최대로 가동하고 있으나 %&*&%*&# 등등 집을 나서는 내게 엄마가 하는 걱정 어린 잔소리 같은 기관사의 당부가 이어졌다.
신입인가? 아니면 FM인가? 안내 방송이 좀 기네.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주 중반을 넘겼기에 바닥을 보이는 체력을 잠시나마 충전하는 새벽 출근길. 평화를 깨는 줄줄이 소시지 같은 안내 방송에 살짝 짜증 치밀었다. 다들 피곤한데 적당히 좀 하지 하는 마음이 들끓었다. 끊임없는 당부의 끄트머리, 기관사의 마지막 한마디에 차곡차곡 적립 중이던 짜증 마일리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늘은 목요일, 하루만 더 출근하면 신나는 주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힘드시겠지만 오늘과 내일 잘 버티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도 안전 운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하철 안내 방송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난 99% 이어폰을 끼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흘려듣는다. 보통 하차역 이름이나 문이 열리는 방향도 안내판에 표시되니까 안내 방송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 각종 이유로 열차 운행이 지연된다거나 응급환자 발생, 지하철 경찰대 긴급 출동 등을 알리는 안내 방송도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아닌 이상 그다지 귀담아듣지 않는다. 이미 내 몸은 지하철 안에 있고, 열차가 움직여야 나도 움직이니까. 사람들이 많이 내리면 따라 내리면 되니까. 그런데 그날 기관사의 길었지만 다정하고 따뜻한 응원을 듣고 나니 섣불리 짜증을 냈던 사실이 부끄러워 숨고 싶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이동과 안전을 책임지는 기관사. 전동차를 조작하고 승객들이 무사히 타고 내렸는지 확인하기도 바쁘고 지칠 텐데 어떻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여유가 있는 걸까?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보다가 그 비결을 알게 됐다. 서울교통공사에서는 매년 승무원을 대상으로 ’ 최우수 방송왕' 대회를 연다. 지하철 운행 중 승객들과의 소통을 위해 필요한 안내 방송 능력을 평가해 ’ 올해의 방송왕‘을 선발한다. 그날 어쩌면 방송왕 과거 수상자 혹은 미래의 방송왕이 운전대를 잡은 열차를 탔을지 모른다. 인사고과를 더 받기 위한 K 직장인의 몸부림이라고 생각해도 그 한마디에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은 어깨가 스르르 풀어진 건 확실하다. 이게 바로 따뜻한 말 한마디의 힘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그 새벽 기관사의 한마디에, 지하철에 짐짝처럼 실려 가던 몸에 생기가 돌았다. 오늘과 내일을 잘 보내면 주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당연한데도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깨우쳐준 기관사의 그 말이 고마웠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지쳤다는 핑계로 날 선 말을 나도 모르게 종종 내뱉는다. 내가 던진 가시 돋친 말이 누군가의 여린 마음에 상처를 내고서야 알게 된다. 어이구 또 저질러 버렸구나. 입 밖으로 흩어진 말을 주워 담기란 불가능하다. 사과도 후회도 소용없다. 이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말의 밀도와 온도를 높이는 거다. 얼어붙은 마음을 스르르 녹여주는 말, 컴컴한 마음에 탁하고 스위치를 켜주는 말, 성난 마음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말이면 충분하다. 마음보다 날 선 말이 화살처럼 먼저 날아가려고 할 때, 기관사의 그 말을 떠올리며 재빨리 잡아 보기로 한다. 대신 다정하고 무해한 말들을 먼저 건네기로 한다. 기관사의 그 한마디를 가슴에 단단히 새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