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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r 06. 2023

혼돈 그 자체인 엄마의 냉장고

무질서한 냉장고의 질서를 만드는 일에 대하여

지난 주말, ‘봄 김장’을 했다. 작년 11월 김장을 할 때, 넉넉히 만들어 둔 김장 양념을 냉동해 둔다. 그리고 묵은지에 질릴 이때쯤 그 김장 양념을 꺼내 2차 김장을 한다. 여름 배추는 맛이 없다는 엄마의 강경한 논리에 힘입어 이 집의 딸들은 연 2회 김장 노동에 투입된다. 재료 구입 및 손질은 엄마가 하고 버무리고, 속을 넣는 게 언니와 나의 일이다. 이번에 만들 김치는 김치통으로 총 4개. 양쪽 집에 모두 김치냉장고가 있지만 우리 집 김치냉장고는 언제나 만석이라 바로 먹을 한 통을 제외하고 3통이 고스란히 언니 집으로 향할 예정이다. 고무장갑을 끼고 절인 배추에 속을 넣으며 수다를 떨던 언니가 말했다.   

   

“난 냉장고가 꽉 차면 마음이 조급해. 저걸 빨리 해치워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랄까? “      


”나도 냉장고가 꽉 차면 숨 막히는 기분이야 “     


주방과 마당을 부지런히 오가며 소쿠리나 대야를 정리하다가 요즘 것들의 수다를 중간중간 엿들었던 엄마가 말했다.     


”배곯던 시절을 너희가 안 겪어봐서 그래. 뭐가 차 있어야 든든하지. “     


언젠가 인터넷을 떠돌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에 홀린 듯 클릭했다. 제목이 [우리나라에서 사재기가 없는 이유]였던 게시글 안에는 각종 봉지들로 꽉 찬 냉동고 사진이 하나 남겨져 있었다. 그 아래로 ’ 우리 엄마 냉장고인 줄‘, ’ 인정! 저것만 파먹고 살아도 한 달은 버틸 수 있음’, ‘냉장고에 먹을 건 잔뜩 있어. 다만 내가 먹고 싶은 게 없을 뿐’ 등등의 댓글이 달렸다.      


우리 집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냉장고가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음식물로 가득 찬다. 딸들의 강경 반대로 ‘검정 봉지’는 퇴출당했지만, 여전히 엄마의 냉장고는 무질서와 혼돈 그 자체다. 새로 냉장고를 바꿔주기도 했고, 수납 용기를 잔뜩 사다가 정리해도 그때뿐이었다. 빈틈이 보이면 큰일 나는 병에 걸린 걸까? 머지않아 다시 엄마의 바이브로 빈틈없이 음식물로 채워진다. 뭐가 어디에 들어 있는지 모르니 냉장고를 여는 순간, 북극 탐험대가 된 기분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다. 더듬더듬 손끝으로 어떤 음식물인지 확인하다가, 손도 안 닿는 냉동고 끝에서 원하는 목표물을 찾았을 때의 희열은 짜릿하고도 찝찌름하다.


답답한 마음에 집어 든 <부모님의 집 정리>라는 제목의 책을 읽다가 엄마를 조금 이해하게 됐다. 책 안에는 빛바랜 신문 전단지 하나, 전압이 바뀌어 쓰지도 못하는 각종 전자제품도 하나도 버리지 못할 정도로 완고했던 부모님의 짐을 정리하면서 울고 웃었던 열 다섯 가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어느새 약해지고 판단력도 흐려진 부모님의 짐은 점점 늘어가고, 자식에게도 고스란히 짐이 된다. 하지만 ‘무조건 버리라 ‘는 말이나 행동은 부모님들에게 당신이 살아온 날들을 부정하는 것처럼 다가온다고 했다. 단지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라는 말은 곧 이제는 쓸모없어진 자신들도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든다.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엄마에게는 비수로 꽂혔을지 모른다.      


지독한 배고픔의 공포가 만든 습관은 먹고살만한 지금도 여전히 현실에 시퍼렇게 살아 숨 쉰다. 강박에 가까운 엄마의 저장병을 고치기는 불가능하다. 수없이 싸우고, 버리고, 다시 채워지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은 지난한 날들이 그 증거다. 배고픈 서러움을 느껴 본 적 없이 자란 내가 100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나로 태어나는 한 엄마가 가진 배고픔의 공포를 알 수 없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부지런히 없애는 일이다. 먹을 수 없는 엄마가 보는 앞에서 퇴출시키고, 혼돈의 머릿속 같은 엄마의 냉장고에서 부지런히 아직 먹을 만한 음식들을 구원해 낸다. 말라비틀어진 떡국떡은 물에 한참 불려 떡볶이를 만든다. 유통기한 날짜도 흐릿한 어묵을 꺼내 어묵탕도 함께 곁들인다. 떡국떡과 어묵이 빠진 자리에 금세 또 옆집에서 줬다는 나물이 자리를 잡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 나물을 핑계 삼아 냉동고 속 미라처럼 영원의 잠에 취해 있는 묵나물들을 소환해 비빔밥을 만들면 된다. 게다가 비빔밥에는 고명이 필요하다. 냉동 떡갈비를 잘게 다져 볶아 고명으로 얹으면 떡갈비까지도 소진된다. 엄마의 냉장고 채우기 실력이 발전할수록 딸의 음식 창의력도 발전한다. 채우는 엄마와 비우는 딸. 각자 열심히 자신의 방법으로 이렇게 냉장고의 질서를 잡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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