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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r 27. 2023

나와 잘 지내는 법

내가 나인 게 싫어지는 기분 탈출법

일요일 점심, 지난주 똑같은 시간에 반을 쓰고 남은 로제 파스타 소스를 소진하기 위해 냄비에 파스타 삶을 물을 올렸다. 물 끓기를 기다리며 마늘을 편으로 자르고, 양파와 버섯을 손질하고, 냉동 새우를 꺼내 물에 담갔다. 소금과 올리브유 몇 방울을 넣은 물은 아직 끓을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멍하니 기다리느니 시간이 아까워 냉장고 채소 칸에 잠들어 있던 큼직한 무를 꺼내 채 썰었다. 빨간 고춧가루를 뿌려 색을 입히고, 멸치 액젓과 파, 마늘을 넣고 조물조물 무친다. 여기에 사카린(단맛을 내는 합성 감미료, 일명 뉴슈가)을 개구리 손톱만큼 넣는다. 무생채에 설탕을 넣으면 끈적해진다는 엄마의 조언에 따른 필수 재료다. 여기에 다진 생강도 개구리 눈물만큼 넣는다. 생강 하나로 차원이 다른 풍미가 생긴다. 무생채에 파는 잊어도 생강만큼은 꼭 사수한다. 무생채를 다 만들고 나니 불현듯 비빔밥이 먹고 싶어졌다.

      

일단, 당면 과제인 새우 로제 파스타를 먹으며 냉장고 속 채소들의 출석 현황을 파악했다. 왜 있는지 모를 숙주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콩나물 대신 살짝 데쳐 파, 마늘, 참치액을 넣고 조물조물 무쳐 숙주나물을 만들어야겠다. 애호박은 반은 채 썰어 들기름과 고춧가루를 넣고 살짝 볶기로 한다. 나머지 반은 미리 사뒀던 시판 청국장찌개 양념과 함께 청국장에 들어가면 되겠다. 무를 나박하게 썰어 신김치와 함께 볶다가 쌀뜨물을 넣어 뭉근하게 끓인다. 무가 익으면 찌개 양념과 두부, 호박, 팽이버섯을 넣어 우르르 끓이면 모든 준비 완료다. 일요일 저녁은 계획한 대로 청국장찌개와 무생채를 듬뿍 올린 비빔밥이었다.  

     

나의 주말은 단조롭다. 그래서 대부분 예측할 수 있다. 특별한 약속이 없다면 산에 다녀와 씻고 부모님과 점심 외식을 한다. 근처 저가 커피 전문점에서 수다를 떨며 커피를 마신 후 마트나 시장으로 향한다. 주말 동안 먹을 간식이나 특식 재료들을 산다. 집으로 돌아와 장 본 재료들을 정리하고 책을 챙겨 나가 카페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는다. 해지기 전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준비하는 사이 세탁기를 돌린다. 남은 주말은 글을 쓰거나 다듬고, 다음 끼니때 먹을 식사 메뉴를 고민하고 완성한다. 자극 하나 없이 무해하기 그지없는 시간이다.  

    

주중의 나는 시뻘건 불덩이 같은 예측 불가능한 일들을 양손 가득 올리고 어쩔 줄 몰라 절절맨다.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오는 돌발상황, 변수, 진로 변경,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일들을 응대하고 수습하다 보면 진이 다 빠진다. 물기 하나 없는 무말랭이 같은 퍽퍽한 상태로 주 5일을 보내고 나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싫어진다. 일을 척척 해내는 척,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넘기는 척, 거침없이 행동하는 척... 남들을 흉내 내보지만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어색하다. 차고 넘치게 먹은 ‘짬’이 부끄러워 도망가고 싶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뭐가 못나서 힘들게 쌓고 쉽게 무너지기를 반복하는지 어이없다. 그래서 에너지가 바닥나는 금요일 오후쯤에는 우주최강 못난이가 된다. 내가 나인 게 싫어지는 5일을 보내고 남은 결과다.      


그래서 주말에는 바닥난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모든 시간을 쓴다. 주말 곳곳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촘촘하게 깔아 둔다. 나와 잘 지내기 위해 찾은 해결책이다. 어렵지 않게 음식을 만들고, 책도 읽고, 산에도 가고, 글도 쓰면 좀 괜찮은 사람이 된 기분을 충전할 수 있다. 우주 최강 못난이에서 경기도의 흔한 못난이 정도로 변신한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아무리 발버둥 쳐도 5일 후면 다시 우주 최강 못난이가 될 거다. 하지만 일단 이렇게 차곡차곡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에너지를 채워야 한다. 그래야 무 자르듯 칼로 뚝 잘라서 떼서 버릴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는 ‘나’를 데리고 살 수 있다. 예민하고 까탈스럽지만, 맛있는 음식과 평온한 시간이면 금세 순한 양이 되는 비교적 가성비 좋은 사람이라는 점을 주말마다 확인한다. 월요일 시작과 동시에 시꺼먼 불안이 그림자처럼 쫓아다니기 시작할 거다. 그래도 내가 나인 게 마냥 싫은 게 아니라 나도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는 기분을 충분히 충전했으니 또 한 주를 잘 살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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